안녕하세룡! 인천항만공사 해룡이에룡!

 

오늘은 6.25전쟁 70주년이 되는 날이지요. 남한과 북한의 관계가 심상치 않은 요즘, 더 이상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6.25 전쟁을 뒤바꾼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알아보려 해요.

 

 

1945년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한국은 북위 38도 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미소 양군이 나누어 주둔하여, 국토가 분단되었는데요. 이러한 배경 가운데 6.25 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이 남북 군사분계선이던 38선을 기습 남침하면서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북한군은 남진을 계속하다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낙동강에서 교착상태를 맞게 되었는데요. 국제연합군은 기회를 노려 북한군의 허리를 절단하여 섬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그 첫 작전이 바로 인천상륙작전이랍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뒤 국제연합군(UN군)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된 맥아더 장군은 직접 한강 전선을 시찰하고, 북한군의 남진을 막기 위하여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는데요. 작전 계획 초반의 맥아더 장군의 의견은 미 합동참모본부와 해군 및 해병대 측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쳤다고 해요. 그 이유는 인천의 자연적 조건이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답니다.

 

인천 앞바다는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하여 작전을 펼칠 수 있는 날이 제한적이고, 인천항이 대규모 상륙함대가 자리 잡기에 협소하다는 이유도 있었는데요. 맥아더 장군은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그 이유로 상륙작전의 장소로 인천을 선택하였고, 결국은 적의 의표를 찔러 성공적인 상륙작전이 되었답니다.

 

인천상륙작전은 총 3단계로 진행되었는데요. 제1단계로 1950년 9월 15일 오전 6시 한·미 해병대가 월미도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작전 개시 2시간 만에 점령을 끝냈어요.

그다음 2단계로 한국 해병 4개 대대, 미국 제7보병사단, 제1해병사단이 전격 공격을 감행하여 인천을 점령하였고, 김포비행장과 수원을 확보하여, 인천 반도를 완전히 수중에 넣었답니다.

 

마지막 제3단계로 한국 해병 2개 대대, 미국 제1해병사단은 19일 한강을 건너 공격을 개시하였고, 20일 주력부대가 한강을 건너 27일 정오 중앙청에 한국 해병대가 태극기를 게양함으로써 인천상륙작전이 마무리되었어요.

 

인천 연수구 옥련동에는 인천상륙작전의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고 보존하기 위한 인천상륙작전 기념관이 있는데요. 인천상륙작전의 구상 및 발전단계, 인천상륙작전의 의미 등이 잘 설명되어 있고, 관련 유물과 자료, 6.25 전쟁 당시 무기와 유물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해요.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협동으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역사적 의의도 가지고 있지만, 많은 민간인이 피해를 입기도 했던 인천상륙작전.

더이상은 이런 아픈 역사가 반복되지 말아야겠단 생각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데요. 앞으로는 갈등 없는 평화로운 남한과 북한이 되길 바라며, 해룡이는 다음 주에 더 유익한 꿀팁을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