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룡~! 인천항만공사 해룡이에룡~!! 4월 19일이 무슨 날일까요? 이날은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특별한 기념일인데요. 바로 대한민국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인 4·19 혁명이 일어난 날입니다. 어떤 이유로 정부를 향해 시민들이 한목소리를 내어 항거한 것인지, 그로 인해 어떠한 역사가 만들어졌는지 1960년 4월, 그날의 함성 속으로 인천항만공사 해룡이와 함께 떠나볼까룡? 

 

4·19 혁명의 개요
4·19 혁명은 헌정사상 최초로 불의한 독재정권에 항거한 민주주의 혁명이에요.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3.15 부정선거에 항거해 전국적으로 동시에 일어난 이 혁명은, 정권의 타도에 성공하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민주주의 혁명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배경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지만, 완전히 뿌리를 내리기도 전 곧바로 이어진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 국토가 폐허가 되고 말았어요. 그 때문에 경제는 자생력을 잃고 외국의 원조에 의지하게 되었고, 물가는 치솟고 일자리가 부족해 실업자가 폭증하게 되었습니다. 농촌경제가 파탄이 나고 더욱더 도시로 인구가 몰리며 도시 집중화가 이루어지고,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화하는 등 1960년대에 이르러서는 사회, 경제 전반적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최고조에 달해 있는 상황이었어요.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국민들의 정서는 고려하지 않은 채 각종 개헌을 통한 정권연장과 독재 체제 강화에만 몰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국민들은 독재를 규탄하고 국민의 의사가 반영된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를 요구하게 되는데요. 이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국민의 민주의식이 빠르게 발전하게 된 것은 광범위한 민주교육과 급격한 도시화의 결과에요. 도시에서 더욱더 쉽게 접촉할 수 있는 대중매체를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아주 높아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높아진 민주적 의식으로 정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이 매우 늘어나고 선거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어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발생한 3.15 부정선거가 바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4·19 혁명의 전개
이승만 정부는 이러한 배경에도 불구하고 정권 연장을 위해 부정선거를 감행합니다.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반공개 투표 등의 방법으로 자행된 부정선거는 국민들에게 큰 분노를 주게 되는데요. 이에 3월 15일 경상남도 마산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평화적인 부정선거 반대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를 강제로 해산시키기 위해 경찰은 총을 발포하고 무력을 동원한 체포 작전으로 7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다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계속하여 시민의 분노가 쌓이던 중 3·15 부정선거 규탄 중 실종되었던 10대 김주열 학생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4·19혁명의 불길이 타오르게 됩니다.

3·15 마산의거 이후 처음으로 4월 18일 고려대에서 학생시위가 일어나게 되고, 이에 참여한 후 귀가하던 학생들은 경찰과 모의한 반공청년단이라는 정치깡패에 의해 테러를 당하게 되고, 무차별적인 폭력진압을 이어가는 정부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며 4월 19일 전국적인 시위가 시작됩니다. 1960년 4월 19일 학생들은 선언문을 낭독하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시작하였고, 이 행렬에 시민들이 합류하며 국회의사당과 경무대로 향했습니다. 경찰은 전과 마찬가지로 발포로 저지하려 하였고, 정부에서도 계엄령을 선포하며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으나 이미 폭발한 민심은 이 정도로 달래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계속되는 시민들의 퇴진요구와 계엄사령관의 시위대를 향한 발포 중지 명령이 있은 후,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월 26일 하야 성명을 발표하고, 이어서 하와이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어요. 시민들의 목소리로 독재정권을 몰아내고 민주주의를 쟁취에 성공한 최초의 혁명이 완성되는 순간이었습니다. 

4·19 혁명 이후 각계각층에서 민주화를 요구하고,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과 처벌 등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게 되지만 새롭게 들어선 정부 역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데다, 안정화가 되기도 전에 발생한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지속되지 못했어요.

비록 혁명 이후의 결과가 매끄럽지 못했지만 4·19혁명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학생과 시민이 중심이 된 최초의 민주주의 혁명이었고, 민주주의 발전에 초석을 마련한 계기였습니다. 4·19의 정신이 이후의 각종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져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인천항만공사 해룡이와 함께 4·19 혁명의 이야기를 알아보았습니다. 힘들게 이룩해 놓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정신이 꺾이지 않도록 4·19 혁명을 모두 절대 잊지 말고 기억하도록 해요.
그럼 다음 시간에 다시 만날게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