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대구대학교 무역학과 심종석 교수

 

 

  “노인과 바다”, 교양인이라면 언제고 한 번 쯤 접해 보았을 헤밍웨이의 대표작 중 하나이다. 줄거리의 대강인즉슨, 어느 날 운이 다한 늙은 어부가 홀로 작은 배에 의지하여 드넓은 대해로 나가게 되는데, 노인은 그 도상에서 뜻밖에 거대한 청새치를 낚게 된다. 노약한 노인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낮 없는 사투 끝에 청새치를 옭아 선측에 동여맨 후 항구로 끌고 오게 되지만, 허무하게도 도중에 피 냄새를 맡고 몰려 든 상어 떼에게 청새치를 남김없이 뜯기고 끝내 앙상한 뼈와 대가리만 싣고 귀항하게 된다. 아무런 소득 없는 허탈한 여정이었음에도 노인은 자신의 허름한 오두막에 몸을 누이고 이내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 꿈을 꾸며 잠이 든다는 내용이다.

 

단순한 스토리이지만 작금의 우리 조선업과 해운업을 이 단편의 줄거리에 빗대어 관조해 볼 요량이면, 일견 특별한 함의를 되새길 수 있을 것 같다. 비유컨대, 중국을 포함한 후발 해운국과 다국적 선사들이 상어 떼라면 작금의 우리 조선업은 갈기갈기 찢긴 청새치에 비유할 수 있을 것 같고, 거대한 청새치를 끌고 오기에 턱없이 초라했던 노인의 배는 마찬가지로 벼랑 끝에 내몰린 현재 우리의 해운업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또한 노인이 초원의 사자를 꿈꾸고자 의지했던 초라한 오두막은 척박한 수몰지역에서 시나브로 무너져가는 토담집과도 같은 운이 다한 우리 해운경제의 초췌한 실상이라고 보아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렇지만 또 다른 시각에서 이러한 위기의 현실을 이 단편에 비추어 볼 때, 유별난 차이점 하나를 적시할 수 있다면, 그것은 노인이 상어 떼와 처절한 사투를 벌이면서 수없이 되뇌었던 독백으로서, “사람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비장한 집념일 것이라 본다. 이는 작금의 우리 해운경제의 현실을 주시함에 있어, 제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이러한 노인의 집념을 호리(毫釐)라도 찾아볼 수 있기는커녕 되레 넋 놓고 망연자실해 있는 막막한 현실을 함의한다.

 

  이러한 적시와 함의를 재차 치환해 볼 경우, 그때 더 큰 배를 가지고 항해에 임했더라면, 그때 힘센 선원 몇과 함께 의기를 투합했더라면 하는 절절한 회한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게 되는데, 나름 그 저변에는 벼랑 끝에 몰린 우리 해운경제의 실상에 관한 끝 간 데 없는 자조가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뜯겨져 너덜난 청새치와도 같은 조선업, 수몰지역의 초라한 토담집과도 같은 해운업, 지난 한 때의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막연한 앞날만을 꿈꾸며 있는 운이 다한 노인과 같은 해운경제 등은 예전의 소설이 아닌 이 시대 다큐멘터리로서 또 다른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가 될 수 있기에 충분할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헤밍웨이는 노인 곁에 언제고 그의 편이 되어 주었던 한 어린 소년을 남겨 두었음을 상기할 때, 필자는 이 지면에서 이 어린 소년의 장래를 우리 해운경제에 결부하여, 그렇지만 이후로 전편을 유추하여 새롭게 스토리텔링 한 후편의 다큐멘터리 제목으로서, 예컨대 “소년과 바다”라는 제목을 붙여 그 줄거리의 요목과 대강을 되짚어보고자 한다. 여기서 꿈과 비전은 꾸는 것이 아니라 생존과 투쟁에 기한 집념을 다잡아 이후로 반드시 극복하고 성취하여야 할 당위로서, 나아가 그때 노인이 남긴 집념과 독백을 올바로 반추하여 떳떳하고도 자랑스러운 장래를 담보할 수 있는 소년으로서, 이른바 작금의 우리 해운산업이 나아가야할 순기능적 본디의 정체로 새겨두고자 한다.

 

  그러나 여기서 명확히 되짚어 둘 논점은 이러한 꿈과 비전이 작금의 우리 해운경제를 되살릴 수 있는 특단의 해결책이라기보다, 이는 오로지 침체된 해운산업의 경기를 재차 진작하고 견인할 수 있는, 이를테면 재도약을 위한 처음시작의 실제라는 사실이다. 당해 논점은 지난 날 그 어떤 해운기업을 막론하고 저마다의 생존을 위하여 반드시 내부화하여야 했을 보편적 당위로서 뿐만 아니라 도약의 첩경이 될 수 있기에 부족함이 없었음에도, 오히려 이러한 당위와 첩경을 좌시하거나 경시하였던 결과가 종당에는 현재와 같이 국가경제의 기조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총체적 위기의 동인이었다고 보아,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금 이를 반추하여 곱씹어 보는 것도 나름 특별한 의의가 있을 것으로 본다.

 

  첫째, ‘구조조정과 혁신’이다. 이는 우리 해운경제에 다시금 회생의 숨결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다각적 자구책의 공통분모로 취급하기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때, 그 골자는 무차별적 유휴자산의 매각, 과감한 인력감축 및 기업의 체질개선, 수익과 효율을 중시하는 현장중심의 경영방식 등의 도입으로 일괄할 수 있다. 요컨대 해운기업 저마다의 다종다양한 자구책은 그 저변에 끊임없는 구조조정과 시의성 있는 혁신의 결과로서 필요외적 비용절감을 최우선의 기치에 두어야 한다. 공정거래와 신의에 반하는 운송업체와의 암묵적 결탁, 특수관계자 또는 외견에 불과한 계열사 갑을 간의 배타적이고도 무차별적인 일감의 집적공여, 영세운송업자 상호 간 이해득실의 보전을 위한 하석상대(下石上臺)식 담합, 왜곡된 운임할려(運賃割慮)의 남용에 따른 화주구속적 경영행태, 지주회사의 독점 내지 비전문경영자의 독단에 의한 전근대적 제살도리기식 기업경영 등은 여하히 불식되어야 한다. 세계경제의 위축에도 불구하고 현재 그 위상을 견실히 보전하고 있는 덴마크 머스크라인의 실제를 전가의 보도로 삼을 수 있다고 본다.

 

  둘째, ‘국내・외 선사 간의 전략적 제휴’이다. 국적선사의 국제적 위상과 경쟁력을 견인하기 위해서는 다국적 글로벌 대형선사 간의 해운동맹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또는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이를 통해 시장지배력을 견고히 확대・제고하여야 한다. 다만 당해 동맹 내에서 여하히 동등한 교섭력을 담보하지 못하거나, 차별적인 경쟁력을 시의성 있게 내부화하지 않으면 언제고 도태되거나 형해화(形骸化)될 수 있다는 인식의 명확한 각인이 선결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이에 참여하고 있거나 참여하고자 하는 국내 해운기업에 대해서는 국가정책적 특단의 지원이나 국내・외 금융기관의 전략적이고도 합리적인 지원이 선행 또는 유치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그 모토는 종전과 같이 특혜성 임시방편의 단기적 지원책이 아닌 선별적이고도 중・장기적인 지원책 및/또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수혈되어 이로부터 자립적인 경쟁력을 담보로 국제신인도 제고의 총화로서 적극 병합・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고정비 절감’이다. 주지하듯 그간 각국의 주요 선사들은 지속적인 해운수요증가에 선제적 기업역량을 집중하고자 너나할 것 없이 밴드왜건(band wagon)식 선대를 경쟁적으로 확충하여 왔다. 이러한 시류는 세계경제의 물밀듯한 침체에 따라 선복량의 초과공급을 야기하여 전례 없는 해운시황의 총체적 불황을 촉발하였다. 그 결과 다자 간 무차별적 운임경쟁에 따른 운항수입의 급감, 기하급수적인 적자누적, 선박의 운항중단, 중고선의 인도 내지 신조선의 발주 보류, 해운기업의 법정관리 및 도산, 용선료 지급불능 등의 역기능이 상호 연쇄적 킬체인(kill chain)을 형성하여 지속적으로 악순환 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나 이러한 해운불황은 부정기선의 비중이 높은 우리 해운기업에게 있어 기업경쟁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고비를 넘어, 급기야 이제는 생존을 위협하는 막다른 절정에까지 치닫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해 논점에 기하여 구조조정의 비효율성으로부터 비롯된 폐해는 차치하고, 통상 해운기업의 고정비에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계정은 모름지기 유류비 과목일 것이다. 살피기에 현재 유류비 절감을 위한 선진해운기업의 자구책으로서 주목할 수 있는 특단의 경향은 이른바 ‘적시(on time) 운항’을 꼽을 수 있다. 전 세계적 유가상승에 따른 전면적 대응에는 일말의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보다도 유류비 절감을 위한 방편으로서, 예컨대 ‘감속운항’, ‘유류헷징’, ‘항로조정’, ‘공동운항’, ‘유류공동구매’ 등은 ‘적시운항’과 함께 현재 일련의 자구책으로서 부각되고 있는 상황이다.

 

  넷째, ‘해운서비스의 차별화’이다. 본 사안에 관한 전략기반은 소위 ‘문전(Door-to-Door) 서비스’에 기초한 선제적 종합물류망 구축에 두고 있다. 이는 앞선 국내해운기업의 전략적・순기능적인 프로세스 간 업무제휴 내지 통합의 형태로 현시되어야 함을 필요조건에 두고 있음과 동시에, 배전에 앞서 살핀 국가정책적 지원을 배경으로 이에 해운산업 주체 간 순기능적 합종연횡에 의한 전면적 재편을 충분조건에 두고 있다. 예컨대 선박의 개・보수를 위한 계선망(繫船網) 확충, 무분별한 운송주선업체의 면허제에 따른 정책적 구조조정, 국가기간망으로서 수익성을 담보한 중・장기적 항만시설의 선진화, 적자상계를 위한 완충적 시각에서 특수전용선・자동차선・크루즈선 등의 배후기간망 확충, 원스톱 내지 무서류화에 의한 전자적 통신수단의 고도화 등과 같은 다각적 활로모색이 적극 강구되어야 할 것이다. 그 밖에도 선종의 기능과 용도변경에 따른 채산성 제고, 선용품 공동물류를 위한 정책적・제도적 지원, 첨단 조선기자재 산업의 국가정책적 부양, 해양경제특구의 선진화와 효율적 거버넌스 체제구축 등의 사안 또한 당해 논점에 결부할 수 있는 거시적 차별화 전략의 일환으로 새길 수 있을 것이다.

 

  모름지기 해운산업은 선진무역입국으로서 우리나라의 명실상부한 추진동력으로 보아 재론의 여지가 없다고 할 때, 앞서 소설에 빗댄 현재와도 같이 이미 고갈된 연근해 어장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꿈꾸거나, 낡고 삭은 초라한 배로 또 다시 고식지계(姑息之計)식의 항해를 기도(企圖)하거나, 박쥐구실과 마찬가지로 가시적 이해를 따라 표류하는 상어 떼와 같이 전근대적 해운경영을 답습하거나, 한강투석과도 같은 한시적 국가정책의 오두막에 의지하거나 하는 등의 운이 다한 전례는 전가의 보도로 가차 없이 끊어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이상과 같이 필자가 소년에 빗대어 언급하였던 일편의 자구책은 어찌 보면 노인이 꿈꾸고자 의도하였던 아프리카 사자와도 같이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마치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식의 허무한 처방일 수 있다고도 생각된다. 그렇지만 소년의 장래는 노인의 전례를 반추하여야 새로운 첩경을 모색할 수 있고 또한 그 도상에서 올곧게 성장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아 모쪼록 이러한 반추가 초부득삼(初不得三)을 위한 꿈과 비전의 모토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젊어 보았던 노인이 남긴 반추의 유언이 늙어 보지 않은 소년의 장래에 일말의 순기능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인지의 여부는 우리 해운산업 존망의 가늠자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본다. 가까운 장래, 단편 아닌 다큐멘터리로서 새로운 “소년과 바다”의 줄거리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