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기의 책보기 17. 집착으로부터의 도피 


시와 문장과 인생에 대한 성찰

이재무 시인 에세이. 천년의시작 펴냄.









시인들이 화려하게 부활하고 있다. 

SNS(쇼셜 네트웍 서비스) 때문이다. 시인들의 감성 진한 언어유희와 촌철살인이 

말랑말랑 촉촉한 단문의 글을 선호하는 네티즌들의 식성과 맞아떨어져서다. 


여기 중년의 성인이라면 뭔가 느낌이 남다를 시를 한 편 소개한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 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에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나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먼 바다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 냈으면, 






필자가 아는 선에서 노혜경, 류근, 림태주, 김주대, 이호준, 박훈 등과 함께 

SNS, 특히 페이스북을 주름잡는 이재무 시인의 시인데 ‘저녁 6시’라는 그의 시집에 들어있다. 

필자 또한 이 시를 무척 좋아한다. 

시인 스스로 밝히듯이 삼류대학 나와 1983년 ‘삶의 문학’을 통해 시작(詩作) 활동을 

시작했던 이재무 시인은 문단 바닥 좀 아는 사람에 따르면 패거리 문단의 비주류였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맏형 격인 ‘58년 개띠’의 시인은 그럼에도 오로지 ‘시(詩)’ 하나만으로 

결혼과 가정과 삶을 꾸려왔고, 결국 시로써 명예를 얻은, 흔하지 않은 몇 시인 중 한 사람이다.



그가 이번에 새롭게 낸 산문집이 ‘집착으로부터의 도피’다. 

책의 제목은 에릭프롬의 불멸의 고전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빌려왔다고 한다. 

내일 모레면 환갑, 천지만물에 통달하고 듣는 대로 이해할 만큼 귀가 순해진다는 이순(耳順)에 

이를 시인이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자니 자신과 주변의 타인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이 

‘집착과 울컥’이었음을 문득 깨달은 것이다.

이제 그 집착과 울컥을 버림으로써 들판의 꽃이 아름다워 꺾거나(그 순간이 꽃에게는 죽음을 뜻한다), 

자신의 정원으로 옮겨 심는 대신 그곳에 있는

그대로 있게 해야겠다는 것이 시인의 다짐이다. 

자신의 뜻과 눈으로만 만물을 볼 게 아니라 역지사지, 입장을 바꿔서 대상을 바라봄으로써 

집착과 울컥의 굴레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그래야 뜻밖의 낭패를 면하는 것이 인생이란다. 뻔한 추상의 말들이 아니다. 



실제 시인은 일찍 어머니를 여윈 후 어린 나이에 객지 밥을 먹으며 얻은 모성 결핍증으로 인해 

많은(?) 여인들을 아프게 했었다니 말이다. 

그러그러한 시인의 일상이 있다. 시인 ‘동주’와 시를 읊기도 하고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같은 멋진 책을 읽어주기도 한다.

중년 사내의 돌아가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회한은 독자의 눈시울을 촉촉하게 한다.

그래서 이 책은 여러모로 권할 만하다. 뛰어난 글쟁이의 문장(글쓰기)이 있다. 

보통사람과 달리 사물을 관찰, 통찰함으로써 시상을 잡아내는 시인의 눈과 마음이 있다. 

산문과 주제를 같이하는 시(詩)가 중간중간에 배치돼있어 같은 주제로 

시와 산문이 어떻게 풀리는지 볼 수 있다. 

시인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와 그런 시를 쓰는 비밀 주머니도 들어있다. 

이것들 말고도 들어있는 것이 많다.

모순되게도 시인은 ‘집착으로부터의 도피’를 말하면서 시에 대해 사무치는 집착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이 시인의 세 번째 산문집이고, 2014년에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라는 시집으로 

독자들의 곁을 다시 찾은 후 지난 해에는 ‘풀꽃문학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