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그리스인 조르바>


 신간 대신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군림 중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고른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지난 6월 출판돼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리더의 서재에서>(윤승용 지음. 21세기북스 펴냄)는 인문학자, 과학자, 의학자, 법조인, 서평가, 대학총장, 정치인, 행정가, 경영인, 외교관, 야구해설가 등등 각 분야에서 엄선(?)된 34명 리더들의 축약된 인생 철학과 독서편력을 다룬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의 리더들이 가장 많이 1순위로 추천한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하다못해 연세대학교 신과대 김상근 교수는 “20대에 읽었던 최고의 책으로 자유로운 인간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책을 읽다가 숨이 가쁠 정도로 가슴이 벅차 올라, 연세대학교 야구장에 가서 무작정 뛰었던 기억이 난다”고 할 정도로 극찬한다.


 솔직히 필자는 <리더의 서재에서>를 만나기 전까지 <그리스인 조르바>에 대해 그리 우호적이지 않았다. ‘우리와 우리역사도 아직 다 모르는 판에 무슨 그리스인까지…’라는 알량한 애국심(?)에 쏟아지는 신간 소화에도 시간이 모자라서다. 그러나 <리더의 서재에서>를 읽고, 특히나 김상근 교수의 감상 평을 읽고서는 더 이상 <그리스인 조르바>를 방치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은 많은 리더들이 최고의 책으로 치는 ‘뭔가’를 찾기가 쉽지 않은 책이 <그리스인 조르바>다. 조르바의 여성들에 대한 ‘막돼먹은’ 언행이 예의를 중시하는 신사나 패미니스트에게는 더 없는 비난의 대상이 될 거라는 것 말고는. 아니나 다를까, 주변을 탐문 해봤더니 <그리스인 조르바>가 대단하다는 사람보다는 몇 번이나 읽다가 포기했다는, 도대체 뭐가 그리 유명한 책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다 쉽게 이 명작(?)을 읽을 수 있도록 살펴보는 게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단, 남들이 좋다 해서 무조건 나도 좋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별 감흥이 없었다면 ‘그렇구나’ 생각해 버리면 되는 것이다. (그걸로 전혀 스트레스 받지 말지어다!) 위의 김상근 교수만 하더라도 당시 신학도였기에 조르바가 그리 남다를 수 있었다. 덧붙여 조르바에게 대단한 감명을 받았다는 사람 중에는 진짜 그런 사람과 실제론 읽지도 않았거나 제대로 이해를 못 했으면서도 지적 허영심으로 뻥 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오디세이>를 극찬하는 식자들 중에 실제로 이를 읽은 사람은 백에 한 명도 안 된다는 사실!)


 하여튼 살펴본 결과는 이렇다. 첫째, 조르바를 쉽게 읽는 법은 의외로 책(열린책들 출판사 세계문학 21권, 이윤기 옮김) 안에 있다. 번역가 이윤기 선생이 ‘20세기의 오디세우스’라는 23페이지 분량의 후기를 통해 조르바의 역사적, 철학적 배경을 충분히 설명해 놓고 있다. 이 후기를 먼저 꼼꼼히 정독하고서 본문을 읽으면 쉬운 이해에 도움이 크게 된다.


 둘째, 후기에서 다루는 그리스 민족시인 호메로스의 오디세이를 조금만 알면 된다. ‘트로이의 목마’로 트로이를 정복했던 이타카(ithaka)의 왕 오디세우스 이야기다. 그렇지만 조르바보다 더 어려운 <오디세이>를 굳이 읽을 필요는 없다. 인터넷에 넘치는 ‘세이렌 신화’의 줄거리만 몇 줄 읽으면 주인공인 ‘나’가 조르바의 연인 오르탕스 부인을 ‘늙은 세이렌’이라 부르는 의미도 알게 된다.


 셋째, 앤소니 퀸이 주연한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영화를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다. 앤소니 퀸이 해변가에서 춤 추는 장면이 많이 알려졌는데 그 또한 ‘신은 죽었다. 춤을 춘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가 되는 것이자 영혼을 가꾸는 것’이라 한 철학자 니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이윤기 선생은 후기에서 작가의 정신적 피라미드에는 베르그송, 니체, 호메로스가 깔려있다고 했다.)


 이 정도 워밍업이면 이제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을 붙든 채 조르바를 읽으면 되겠다. 그러면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늘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나는 비참한 기분이 되어 두 눈을 감았다”는 주인공 ‘나’의 고백도 충분히 이해된다.


 조르바는 ‘신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구원해야 한다’고 감히 큰소리 치며 ‘인간의 입장에서 신과 대결을 벌였던 사람’이다. 때문에 위선과 속박의 계명 따위는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했던 조르바의 털끝도 건드리지 못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이 때문에 그리스 정교회로부터 신성모독으로 파문을 당했고, 고향 크레타의 나무십자가 묘지에 묻혀야 했다.) 간서치(책만 보는 바보)로 율법과 우유부단에 얽매여 있는 주인공 ‘나’가 조르바에게 감탄하는 이유다.


 도자기 빚는 재미에 방해 되는 손가락을 잘라버릴 만큼 내면의 목소리에 충실했던 조르바, 자신이 거덜 낸 갈탄광 사업을 달밤의 한 판 춤으로 퉁쳐버리는 조르바의 ‘자유로운 영혼,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읽어내면 된다. 조르바는 ‘천상천하 유아독존’, ‘운명아, 길을 비켜라. 내가 간다!’ 외치는 사람임을 눈치채면 된다. 그의 삶은 서강대 최진석 교수가 저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를 통해 던지는 ‘우리는 나를 가두는 감옥, 오직 나의 욕망에 집중하라’는 외침과 일맥상통한다.














북컬럼니스트 최보기 theb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