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역사를 따라서, 인천광역시립박물관




 인천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으신가요? 저는 사실 인천의 역사도 대한민국의 역사 속 한 부분이고, 따로 중요하게 생각해 볼만큼 수많은 역사유적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인천에 사는 시민이 아니라면 인천의 역사를 따로 생각해보고 관심을 가져볼 기회가 적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천의 역사, 유적이라 하면 가장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선사시대의 유적인 강화도 고인돌, 그리고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담당한 초지진, 덕진진 등,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동네와 일본식 건축물들, 오랜 역사를 지닌 철도, 항구 유적 등등 상당히 많은 부분이 근대 개화장과 외국과의 전쟁, 교류를 통해 발생한 유적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동북아의 허브’라고 불리는 국제도시 인천에 어울리는 역사유적이라는 생각이 들지요? 자, 그럼 이렇게 많은 인천의 역사 흔적이 전시되어 있는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떠나볼까요?




 1946년 4월 1일 우리나라 최초로 개관한 공립박물관이었던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인천시 역사유물의 관리와 전시행사, 그리고 학술조사를 담당해 왔습니다. 처음엔 인천시 중구 송학동에 위치해있던 박물관은 1990년 5월, 현재 위치하고 있는 인천시 연수구 옥련동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현주소 :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량로 160번길 26) 그리고 2006년에 박물관 건물의 리모델링을 완료하여 멋있는 현대식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박물관이 큰길가에 위치하고 있지 않아 바로 앞까지 가는 시내버스는 없지만 16, 111-2, 3001, 9200, 6, 6-1, 8, 65-1, 523번 버스를 타고 가면 가까운 곳에 내려 걸어갈 수 있습니다. 송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위쪽으로 가면 찾을 수 있고, 반대 방향에서는 축현초등학교 옆 오르막 길을 따라 300m 정도 올라가면 박물관입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박물관 밖에는 넓은 옥외전시장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들과, 일제강점기에 미학을 공부하여 우리 미술을 처음으로 학문적인 차원으로 발달시켰던 미술학자 우현 고유섭 선생의 동상과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옥외 전시장은 조용하기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면 옥련동 일대와 송도신도시까지 보일만큼 좋은 전망을 갖추고 있어, 시민들의 휴식처로도 이용되고 있답니다.











 박물관입구에는 현재 진행 중이거나 예정인 강의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이 있습니다. 제가 박물관을 다녀왔던 4월 29일 당시에는 동아시아 영토분쟁에 대한 강연이 진행 중이었고, 5월부터는 월미도에 대한 강연이 이루어질 계획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은 기간을 정해놓고 특별 강연프로그램과 전시행사 등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도민준曰 "맞아. 나는 400년 전에 외계에서 이곳에 왔고, 내가 살던 별로 돌아가지 못했고, 이 땅에서 400년을 살아왔어.“

 천송이曰 “도민준씨. 가자 집에. 우리 도민준씨 아직 많이 아프네.”

 그리고는 와장창 깨져버리는 유물보호유리. 얼마 전,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SBS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 12화에서 외계인 도민준이 천송이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는 장면이 연출되었던 박물관 배경이 바로 이곳, 인천광역시립박물관 공예실이라고 합니다. 인기드라마의 촬영지가 된 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물관 관람코스의 시작인 역사실에 들어서다보면 입구에 사진과 같은 연표가 벽에 서 있습니다. 강화와 부평, 인천과 대한민국의 연표를 나란하게 두어 각 역사적 기록의 시간들을 쉽게 비교할 수 있도록 정리해 두었습니다. 역사실은 선사시대 유적부터 시작됩니다.




 사진 속의 빗살무늬 토기가 사용되던 시대는 신석기시대입니다. 신석기시대는 신석기 혁명으로 인하여 농경이 시작된 시기이지만 아직까지는 어로와 수렵, 채집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에 먹을 수 있는 자원이 풍부한 곳을 선호하였습니다. 마침 인천은 바다와 갯벌이 매우 넓어 신석기인들에게는 훌륭한 생활의 근거지가 되었고, 인천의 강화도, 영종도, 백령도, 연평도 등에는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는 조개무덤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청동기시대에는 농업 생산량 증대를 위한 도구들이 많이 발명되었는데, 음식을 저장하는 민무늬토기와 농경기구인 반달돌칼과 같은 유물들이 그 예입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계급사회가 형성되면서 부족의 지도자와 같은 사람들의 위엄을 나타내는 고인돌과 같은 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 고인돌은 문학산일대, 서구 검단지역, 강화도에서 많이 발견되어 이곳이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널무덤을 복원한 것입니다. 동양동 1호 널무덤이라고 불리는 이 무덤은 그 양식이 삼국시대 초기에 유행하던 것이라고 합니다. 또한 비류가 미추홀(지금의 인천)을 수도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을 때 문학산에 세운 산성이 문학산성이라고 하는데, 실제로 문학산에 올라가면, 복원을 통해 모습을 만들어 놓은 산성터가 약간만 있을 뿐 많이 소실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산성을 복원해 놓은 모습을 작게 표현한 모형도 있었습니다. 




 위의 앞 사진에서 보이는 것은 인천향교기라고 하는 문헌입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실천정신에 따라 백성들을 교화할 목적으로 각 지방에 관립교육기관들을 설치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향교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인천지역에는 강화향교, 교동향교, 문학향교, 부평향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사진은 소학언해의 모습입니다. 이처럼 향교는 인천지역 교육사의 기반이 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조선시대 인구조사용으로 쓰였던 호패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전기 인천지역의 인구는 3,452호에 6,211명으로 1호당 1.8명이 살았던 것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누락에 의한 오차이고 실제로는 1호당 3.6명 정도가 살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후 조선 중기에는 1호당 3.5명이 살았던 것으로 집계되어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유적을 모두 보고 나니 웬 등대모형이 하나 서 있었습니다. 바로 이곳부터 인천의 개항과 근대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외국과의 조약을 맺으며 인천을 개항하던 시절 쓰였던 개항문답 문서와 외국잡지에 소개된 인천개항장의 모습, 그리고 측량기는 당시 인천의 개항문제와 그리고 시설형성사업이 얼마나 활발하게 이루어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인천이 개항을 하고 이곳에서 외국과 많은 교류를 하면서 초기에 외국에서 유입된 외래물품들이 많이 남았습니다. 예컨대, 청진기, 전화기, 안경, 나침반 등이 있습니다.





 위 사진은 개항 후 인천 개항장의 풍경입니다. 1876년 일본과 조선사이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인천에도 개항장이 조성되었는데, 그 결과 인천의 서쪽 끝에서 제물포해안 사이 지역에는 영국, 일본, 청, 러시아의 영사관과 각국의 무역회사 및 사택 그리고 상업시설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개항장은 기존의 다른 인천지역과는 달리 다양한 양식의 근대 건축물이 지어졌고 이국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인천에 개항장이 개설됨에 따라 수많은 국내외 배들이 인천항을 드나들어야 했는데, 인천앞바다의 한 가지 문제점은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수심이 얕아 밀물 때에는 배가 들어오고 나가는 것이 용이했지만, 썰물 때에는 그것이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러한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갑문입니다. 사진 속에 있는 갑문 모형은 초기의 모형이고 현재는 인천 내항에 1만톤과 5만톤 크기의 선박을 통과시킬 수 있는 두 개의 갑문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갑문의 맨 위 사진을 보면 두 단계로 되어있는 갑문이 모두 닫혀있습니다. 두 번째 사진을 보면 배하나가 내항쪽으로 진입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때 갑문 안쪽 내항의 수심은 인공적으로 높게 유지되어 있지만 외항의 수심은 썰물 때문에 얕은 상황입니다. 따라서 배의 출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우선 두 갑문 사이에 있는 구역의 수심을 배가 있는 외항의 수심과 동일하게 맞춘 후 바깥쪽 갑문을 열어 배가 갑문 안으로 들어 올 수 있게 합니다. 세 번째 사진에서는 바깥쪽 갑문이 다시 닫힌 후, 갑문 안쪽의 수심이 내항의 수심과 같게 다시 올라갑니다. 그 후에는 안쪽의 갑문이 열리게 됩니다. 네 번째 사진에서는 동일해진 수심의 덕분으로 배가 쉽게 내항으로 들어설 수 있게 됩니다.




 선사시대부터 근대기까지 인천의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실의 관람이 끝난 후에는 공예실과 서화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특히 공예실은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촬영지입니다. 이 곳에는 도자기, 각종 생활용품, 불상 등등 우리 조상의 미의식이 담겨있는 공예작품과 그림들을 관람할 수 있지만 이곳은 사진촬영이 불가한 곳이라 내부에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공예실과 서화실을 관람하고 나면 여러 기증자의 이름이 붙어 있는 기증실을 지나 박물관 내의 모든 전시실관람을 마치게 됩니다.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을 관람하면서 인천의 귀중한 사료들과 모형을 관람하면서 지금껏 별 생각없이 지나쳤던 곳들이 떠올랐습니다. 문학동의 향교와 산성유적, 강화도의 선사유적, 그리고 현재 중구 동인천일대의 일본, 서양 등이 조성해 놓은 오래된 건물들 이 모든 것들이 살아있는 인천의 역사유적이고 이 모든 것이 현대와 공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인천은 역사적 의의가 아주 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