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만공사 공식 블로그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리며

 

“백년의 약속-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 (조유진 지음, 처음헌법연구소 펴냄)
“우린 너무 몰랐다-해방, 제주4ㆍ3과 여순민중항쟁” (도올 김용옥 지음, 통나무 펴냄)
“안익태 케이스” (이해영 지음, 삼인 펴냄)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우당 이회영” (김태빈ㆍ전희경 지음, 레드우드 펴냄)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일제 식민지 조선의 백성들은 1919년 고종의 죽음을 계기로 3월 1일 전국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에 저항했다. 이를 계기로 한성(서울), 러시아 (흑룡강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 정통성을 확보한 상하이 임시정부는 김구, 이승만 등 독립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임시헌법과 삼권분립체계 수립, 대일항쟁단체 ‘한인애국단’ 조직 등 활동을 강화해 나갔다. 
1932년 4월 29일, 일제가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개최했던 전승축하 행사에 한인애국단원 윤봉길 의사가 폭탄을 투척,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렸다. 이 때문에 일제의 추적과 탄압이 심해지자 상하이 임시정부는 항저우, 자싱, 전장, 창사, 광저우, 류저우, 치장, 충칭으로 대장정을 하며 항일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해방 후 이들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주체세력으로 활약했지만 남북분단, 극심한 좌우이념 대립을 틈탄 친일파 부활 등 예기치 못했던 역사의 굴절과 소용돌이에 또다시 휩쓸려야 했다.

 

 

“백년의 약속-우리가 몰랐던 대한민국 헌법 이야기”
3ㆍ1만세운동과 임시정부수립 이후 제정됐던 헌법의 역사를 중심에 두면서 근ㆍ현대 정치사의 분수령들을 다뤘다. 여기다 추가로 삼권분립과 민주주의 국가의 요건, 개인과 국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규정한 정치철학적 상식과 교양을 함께 다뤘다. 초등학교 고학년들을 대상으로 쓴 책이지만 법과 정치,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일반 국민이라면 누구나 쉽게 저러한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모두 7장으로 구성됐다. 1장부터 6장은 1919년 3ㆍ1 만세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운동과 임시헌법 등 ‘민주공화국의 시작’과 해방 후 제헌국회, 자유민주국가와 전체주의국가의 차이점, 헌법의 허리 권리장전, 삼권분립, 헌법개정을 다뤘다. 7장은 민주시민의 교양을 위한 문답으로 채웠다.

 

“우린 너무 몰랐다-해방, 제주4ㆍ3과 여순민중항쟁”
도올 김용옥이 바라보는 역사적 관점에서 두 사건을 다시 파헤친 책이다. 노(老)학자는 대부분 국민들이 ‘반란과 폭동 사건’으로 학교에서 배워 알고 있는 두 사건의 진실이 전혀 반대라고 주장한다. 해방 후 친일파를 징벌하기 위해 제헌의회에서 제정했던 반민족행위처벌법과 이에 근거해 만들었던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이승만과 결탁한 친일파 경찰의 습격과 김구 암살, 국회프락치사건 등으로 와해됨으로써 ‘친일파 청산의 기회를 잃어버렸고, 독재를 위한 민중 학살을 자행했다’는 주장이다. 다만, 역사는 독자의 입장에서 ‘과거와 현재의 대화’므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안익태 케이스”
우리는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로 시작되는 애국가(愛國歌)에 대해서도 잘 몰랐다. 지금 우리가 부르는 애국가는 법으로 지정한 공식 국가(國歌)가 아니다. 임시정부 때부터 사용이 허락돼 관습적으로 애국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 애국가의 가사는 독립지사들의 집단지성으로 완성됐다는 설이 유력하다. 독립지사들은 이 가사를 스코틀랜드 민요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곡조에 얹어서 불렀다. 그러다 1935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안익태라는 음악가가 지금의 애국가 곡조를 만들어 발표했다. 문제는 일제시대 안익태라는 흔하지 않던 현대음악가가 독일 등 유럽에 남겨놓은게 석연치 않은 행적이다.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우당 이회영”
1910년 12월의 혹한 속에서 국경을 넘는 40여 명의 대가족이 있었다. 만주로 떠나는 이회영 일가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44세의 장년이었다. 이 대가족에는 이회영과 그의 형 건영, 석영, 철영은 물론 두 동생 시영, 호영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회영 일가는 생계를 찾아 만주로 갔다가 독립운동에 눈뜬 대부분의 독립운동가와 달리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만주행을 택했다. 이들이 독립군 양성을 위해 세운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를 빼면 1910년대 서간도 지역 독립운동은 설명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