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항만공사 공식 블로그



인천항만공사 창립 10주년을 맞아 오래된 문학작품을 통해 인천항의 역사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문학작품으로 읽는 인천항 풍경!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박인환 시인의 '인천항'(1947)이란 시를 통해 그 시대의 인천항 모습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박인환(1926~1956)은 

강원 인제 출생으로 경성제일고보를 거쳐 평양의전(平壤醫專) 중퇴, 종로에서 마리서사(書肆)라는 서점을 경영하면서 많은 시인들과 알게 되어 1946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거리', '남풍(南風)', '지하실(地下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아메리카 영화시론'을 비롯한 많은 영화평을 썼고 1949년에 김경린·김수영 등과 함께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간행하면서 모더니즘의 대열에 끼었습니다. 1955년 '박인환선시집'을 간행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여 시공관에서 신협(新協)에 의해 공연되기도 했습니다. 

박인환 시인의 대표작 중 '세월이 가면'은 이진섭에 의해 곡이 붙여져 노래로 불림으로써 더욱 널리 알려졌으며, '목마와 숙녀' 또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 애송되고 있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작품들 중에서도 인천항을 제재로 한 인천 시편 가운데 '인천항'(1947) 같은 시에는, 광복 이후 분단이 가시화 되기 직전 우리 나라의 암울한 분위기가 상징적이면서도 꾸밈없이 표현되어 있어 주목됩니다.



사진잡지에서 본 향항(香港)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중일전쟁 때

상해 부두를 슬퍼했다


서울에서 30킬로를 떨어진 곳에

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

인천항이 있다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

여실히 표현한 인천 항구에는

상관(商館)도 없고

영사관도 없다


따뜻한 황해의 바람이

생활의 도움이 되고자

냅킨 같은 만내(灣內)에 뛰어들었다


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

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

인천 항구이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은주(銀酒)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에 실려오고

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

인천항으로 나침을 돌렸다


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

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

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

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


밤이 가까울수록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


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

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

상해의 밤을 소리 없이 닮아간다


- 인천항 전문 -



특히, 이 시의 "밤이 가까울수록 / 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 / 주둔소의 네온사인은 붉고 / 정크의 불빛은 푸르며 / 마치 유니언잭이 날리던 / 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라는 구절에 단적으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진설명 : 1920년대 인천항 야경 / 사진제공 : 인천항만공사)



인천항에 진주한 미군의 성조기를 보고 시인은, 식민지 향항의 서글픈 운명을 떠올려 보면서, 앞으로 우리 조국에 닥쳐올 분단체제의 불행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인천항이 본격적인 항구로 가능하게 된 것은 1906년부터 시작된 대한제국의 각 항구(인천항을 비롯한 10개 항구) 수축 계획이 수립되어 근대적인 축항공사가 진행되면서 부터입니다. 즉 갑문의 설치가 그것인데 갑문은 수면의 높이, 즉 수위(水位)가 다른 두 수역(水域) 사이에 선박을 통과시키기 위해 만든 시설을 가리킵니다.



(사진설명 : 1918년 완공된 인천항갑문 / 사진제공 : 인천항만공사)



1911년 6월 11일 최초의 갑문시설 기공이 현재 1부두 자리에서 있었습니다. 총 공사비 5백6십6만원을 투자하여 1918년 10월에 준공했습니다. 연결되는 선벽은 높이 39척, 길이 250칸, 폭 120칸, 수면면적 3만 평으로, 갑문 내의 최저 수심은 27척 5촌이기 때문에 4천5백 톤급의 선박 5척을 동시에 계류할 수 있습니다. 갑문은 두 군데의 철제 쌍문(雙門)으로 된 소위 이중갑문식이기 때문에 조수간만의 차이가 30여 척에 이르더라도 46시간 선박 출입이 자유롭습니다.


인천항의 발전과 함께 북쪽 계선장에서는 하역이 더 이상 불가능했기 때문에 1929년 4월부터 125만원을 투자해, 서쪽 사도(沙島)에서 동쪽 분도(糞島)에 이르는 2만7천 평을 매립해, 남쪽에 2천 톤급 선박을 계류하는 안벽 2백칸을 만들어, 도로·철도를 끌어들이고 1,200평의 창고를 건축하는 축항 확장공사에 착수해, 1935년 3월에 완성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