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근대화 속 최초의 기억을 더듬다

 


   우리의 근대화는 일제의 압박에 의한 개항과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1876년 일제는 강화도 조약을 통해 부산, 원산, 인천 등 이른바 ‘3포개항’을 요구합니다. 힘이 약했던 조선은 일제의 요구대로 3포를 개항하고 이로 인해 외래 문물이 조선으로 마구 유입되었습니다. 3포 중에서도 한양과 가장 가까웠던 인천은 그 지리적 이점 때문에 특히 더 많은 외래 문물이 들어올 수 있었고 그렇게 때문에 한양보다도 인천에 최초의 역사를 기록한 곳이 많습니다.

  최초의 감리교회인 내리교회, 서울의 탑골공원보다 앞선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자장면을 만들어 팔던 곳도 인천이고 최초의 호텔이었던 대불호텔도 역시 인천에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인천에는 우리 근대사의 많은 최초가 남아있습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억들을 한번 더듬어보겠습니다.

 

 

이 땅을 구원하소서! 우리나라 최초의 감리교 내리교회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펜젤러 부부는 제물포항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함께 입국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한양으로 향했지만 임신 중인 아내와 함께였던 아펜젤러는 정치적으로 불안했던 한양 대신 인천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인천에 남은 아펜젤러는 이 기간 동안 가정 예배를 드렸고, 한국어를 배웠으며, 한국 선교 전반에 대한 비전을 세우고 한국 사람들의 일상을 관찰했습니다. 그 이후 아펜젤러가 세운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감리교의 첫걸음이되었습니다. 내리교회의 복도에는 아펜젤러의 사진과 초창기 활동을 담은 흑백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내리교회 앞에는 아펜젤러의 뒤를 이은 존스목사와 아펜젤러의 흉상이 세워져있습니다. 한편, 1892년 아펜젤러의 뒤를 이은 존스 목사가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설치한 영화학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이 되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 앞바다를 굽어보는 곳!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

 자유공원에서 인천바다를 바라보는 맥아더 장군동상(위)

  
개항의 물결 속에 인천은 외국 열강의 자본과 사람이 조선으로 들어오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888년에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을 위한 공원이 형성되었는데 이 공원이 각국공원으로서 현재의 자유공원이며, 이는 서울의 탑골공원보다도 9년이 앞선 것입니다. 이 근처는 인천항과 바다를 한눈에 담는 좋은 경관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 일본, 미국, 영국, 독일 사람들이 호각세를 이루며 차지하려고 했던 곳입니다. 1883년에 청나라와 일본이 선린동 일대에 조계를 설정하자 영국, 미국, 독일도 서둘러 해안지대와 응봉산 자락을 분할하여 각국의 조계로 만들었습니다. 각국들이 만든 조계 안에 들어선 공원을 처음에는 ‘각국공원’이라 불렀습니다. 각국공원은 일제 강점기를 맞아 일본 신사가 들어선 ‘동공원’의 반대 방향이란 의미의 ‘서공원’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57년, 한국전쟁 당시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동상을 건립하면서 자유공원으로 다시 이름을 바꾸며 오랫동안 인천을 대표하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가 사랑하는 최초의 자장면이 탄생한 곳 공화춘!

 

 現 짜장면 박물관으로 사용중인 옛 공화춘 건물(위)

  지금의 한국형 자장면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 바로 인천의 차이나 타운입니다. 오늘날 한국인이 즐겨먹는 짜장면은 그 재료와 맛이 많이 바뀌었지만, 개항기 인천항의 화교들을 통해 처음 소개된 중국 산동지방의 음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1883년 인천 개항과 함께 청나라 조계지에는 청의 관원, 상인, 노동자들이 넘쳐났고 요식업과 숙박업도 발달했습니다. 중국 산동에서 건너온 화교들이 삶은 국수에 된장과 야채를 얹어 비벼먹는 고향의 음식 ‘짜장면’을 소개하면서부터 우리나라 짜장면의 역사가 비롯된 것입니다. 짜장면은 조리법이 간단해 된장문화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도 점차 인기를 끌게 되었고, 중화요리가 번성하던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음식점의 메뉴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1905년 많은 청나라 사람들이 안정적인 삶의 터전을 찾아 이주하였는데 이때 청나라 청년 우희광도 조선으로 이주하여 산동회관이라는 객잔을 열고 청나라 사람들에게 숙식을 제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1912년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이를 기념하여 공화춘(공화국 원년의 봄)이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짜장면이 어디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설이 분분하지만 이 곳에서 최초의 짜장면이 탄생하였다는 것이 주된 정설입니다. 현재는 짜장면 박물관 건물로써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가씨 커피 한 잔 할까요? 최초의 호텔 대불호텔

 

옛 대불호텔(좌)                                                               현재 터만 남아있는 대불호텔(우)


  인천 중구청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을 중심으로 좌측이 청나라 조계지, 우측이 일본의 조계지인데 계단 아래쪽에 일본 조계지가 시작되는 지점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 터가 있습니다.

   대불호텔은 1888년 일본인 호리 리키타로가 지은 3층 벽돌로 된 서양식 건물이며, 서울의 손탁호텔보다도 14년이 앞선 최초의 호텔입니다. 1899년 우리나라 최초의 열차 개통이었던 경인선이 개통됨에 따라 점차 이용객이 줄어들었지만 그 전까지는 인천에 도착한 외국인은 하루 이상 머물러야 했기에 서울보다도 먼저 호텔이 생긴 지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1978년 헐린 뒤로 현재는 대불호텔 터 만이 쓸쓸이 그 곳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리교회, 자유공원, 자장면, 대불호텔 이외에도 인천은 최초의 등대, 최초의 성냥공장, 최초의 유리공장, 최초의 시립박물관 등 여러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 모든 최초의 역사가 일제의 착취를 위한 우리의 아픈 최초라 하더라도 우리 역사 속 최초는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은 온전히 인정하고 다시는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게 노력하는 것. 우리나라의 최초의 기억을 더듬어보며 앞으로는 우리 땅 위에 영광스런 최초만이 가득하기를 바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