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 지음 <뜻밖의 한국사>


독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직장에 치이고, 가족에 치이고, 생존(?)을 위한 사교에 치이는 와중이라 주말이면 낮잠 한 번 늘어지게 자는 것도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언제 한가하게 책 볼 시간이 있겠는가 말이다.


때문에 학자나 전문가들이 아닌 일반 대중을 향한 좋은 책은 ‘일단 읽기에 재미있어야’ 예의다. 그런 측면에서 김경훈의 ‘뜻밖의 한국사’는 아주 예의가 바른 책이다. 2004년에 초판이 나왔고, 이번이 개정판이다. 10년 동안 절판되지 않고 읽히다가 개정판까지 나왔다는 것은 이 책이 그 사이 꾸준히 읽혔다는 증거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는 ‘하늘 위의 베스트셀러’라는 꼬리표가 붙어있다. 인천공항에서 장시간 비행기를 타려는 사람들이 사는 책 중에 선두그룹이란 뜻이다.


말 그대로 뜻밖의 역사다. 우리가 아는 역사는 대부분 교과서에서 배운 역사들이다. 교과서는 ‘교과서’이다 보니 정사에 치중할 수 밖에 없다. 단군, 주몽, 온조, 박혁거세, 광개토대왕, 김유신, 왕건, 위화도회군, 임진왜란, 삼전도 치욕, 을사보호조약, 8·15광복과 6·25 동란 등등이 우리가 배운 역사들이다. 황진이와 장희빈, 연산군과 수양대군도 있지만 그건 교과서보다 드라마 소재로 삼기에 적격이어서 우리에게 낯익다.


‘뜻밖의 한국사’가 뜻밖인 것은 알아봐야 그만인 역사적 에피소드들의 잡탕이 아니라 정사와 야사, 양반과 민초들의 내밀한 일상까지를 무시로 넘나들면서 찾아낸, 상당히 의미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 대부분이 그동안 전혀 몰랐던 재미있고, 신선한 것들이라는 게 이 책이 지닌 진수다.


‘표류의 역사’는 효종 때 제주도에 상륙한 네덜란드 하멜의 ‘표류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반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바다 풍랑에 떠밀려 외국으로 표류한 사건을 기록한 우리의 표해록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이들의 기착지는 중국, 류큐, 일본 등지이고 사연도 고기잡으러 나갔거나 과거시험을 보러 떠나다 풍랑에 길을 잃는 등 다양하다.


정조가 죽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순조가 신유사옥을 일으켜 천주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던 1801년 12월, 남해안 섬들을 돌며 홍어를 사기 위해 우이도(소흑산도)를 출발했던 어부 문순득 일행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유구국(오키나와)으로 표류한다. 중국을 거쳐 조선으로 돌아오기 위해 출발했던 일행은 또 다시 풍랑을 만나 여송(필리핀)으로 표류한다. 끝내 중국에 도착한 문순득은 광둥, 북경, 의주, 한양을 거쳐 3년 2개월 만인 1805년 1월 8일 고향 소흑산도로 돌아왔다.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꿈도 꾸기 어려웠던 일본, 필리핀, 중국 견학을 했던 셈인데 그가 언문에능한 양반이 아니라서 귀한 경험이 묻힐 뻔 했으나 때마침 신유사옥으로 그곳에 귀양와 있던 다산 정약용의 형이자 ‘자산어보’를 썼던 정약전으로 인해 역사의 기록으로 남겨둘 수 있었다.


선조 때 일본에서 들어온 구황작물 고구마에 얽힌 역사도 그렇다. 고구마가 우리나라 전역으로 전파되기까지는 무려 3백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동안 민초들을 배고픔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수많은 선지자들이 고구마 줄기에 매달려 일생을 바쳤다. 이광려(1720~1783)는 벼슬이 참봉에 불과했지만 박학다식했다. 중국의 서적을 뒤져 고구마가 구황작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중국 사신이나 일본 통신사들에게 줄기차게 고구마 줄기를 부탁해 재배를 시도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의 구민 노력에 감동한 강필리가 뒤를 이었는데 남쪽의 따듯한 지방에서 기어이 고구마 재배에 성공해 ‘감저보’라는 책을 펴냈다. 이제 김장순이 등장한다. 그는 굶주리는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든 중부지방까지 고구마를 끌어오고 싶었다. 마침 전라도 보성에서 9년 동안 고구마 재배를 연구한 선종한을 만나 서울에서 시험재배에 총력을 기울였다. 1813년, 김장순은 ‘감저신보’를 펴내 중부지방으로 고구마를 확산시켰다. 아무 지위도 없고 고구마를 심을 땅도 없던 가난한 실학자 서경창은 북쪽까지 재배할 수 있는 고구마 연구에 사력을 다해 ‘종저방’을 남겼다. 그의 뒤를 ‘임원경제’의 농학자 서유구가 이었다. 선지자들의 이런 숱한 노력의 결과 1900년대 초 고구마는 가난한 백성들의 고픈 배를 채워주는 전국 작물이 될 수 있었다.


‘관동별곡’을 교과서에서 배운 탓에 문인으로 우호적인 송강 정철은 정적 1천 여 명의 목을 날려버린 조선 최악의 정쟁 기축옥사의 ‘칼잽이’였다. 연산군의 무오사화는 5명 처형, 20 여 명 귀양이 전부였다. 말년에 유배지에서 병사한 것도 그 죄업의 결과였는지 모를 일이고, 그의 작품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역시 ‘독철’이라 불렸던 그의 인품을 경계해서다. 고려시대 남녀가 함께 목욕을 했던 역사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지면관계상 책을 구해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북컬럼니스트 최보기 theb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