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지음 <류성룡, 7년의 전쟁>


'징비(懲毖)'는 시경에 나오는 말로 '지난 일을 경계하여 후환을 조심한다'는 뜻이다. 영의정 류성룡은 임진왜란 때 총사령관 격인 도체찰사로서 온몸으로 전쟁을 치러냈다. 그가 7 년의 전쟁 동안 직접 보고, 듣고, 시행했던 모든 것들을 기록한 책의 이름을 ‘징비록’이라 이름 붙인 이유는 자명하다. 후손들만큼은 그 시절처럼 나라를 형편없게 만들지 말아달라는 유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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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드라마 때문에 갑자기 징비록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지만 실은 드라마 아니더라도 우리가 진작 한 번은 읽었어야 지도자나 국민으로서 도리를 했다거나, 도리를 알게 됐다고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책이다. 임금 선조를 필두로 당시 조선의 실정이 얼마나 형편 없었는지를 낱낱이 실토함으로써 지도자는 지도자대로, 국민은 국민대로 진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절감케 하기 때문이다.


'류성룡, 7년의 전쟁'은 징비록이 아니다. 징비록을 기반으로 선조실록,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도요토미 히데요시, 왜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편지와 기록까지 샅샅이 뒤져서 ‘인간 류성룡’에 대한 총체적 관찰을 이뤄낸 ‘평전’이다. 그러므로 징비록에 더해 7년 전쟁을 치르는 조선 전체, 일본과 명나라 일부의 역사와 실정을 조망하는 플러스 알파가 있다.


류성룡과 선조는 1570년 봄에 만났다. 열아홉의 임금과 스물아홉의 신하였다. 후사 없는 명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열여섯 어린 나이에 뜬금없이 왕위에 오른 선조는 미처 세자교육을 받지 못했기에 군주로서 갖춰야 할 덕목과 수양이 부족했다. 그런 그의 자질은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물밀듯이 한양으로 진격해 오는 순간 여지없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전하,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만약 대가(大駕)가 이 땅에서 한 걸음만 벗어나면 조선은 이미 우리의 땅이 아닙니다. 평양에 머물며 나라를 보존할 계책을 세우소서."

왜군이 북진하자 평양으로 도망 간 선조는 아예 중국 요동으로 건너가 명나라 변방의 제후로나 대접받는 '요동내부책(遼東內附策)'에 필이 꽂혀있었는데 그런 속내는 밀려오는 왜군보다 이반된 민심 때문이었다. 평양으로 도망칠 때 좌의정 윤두수에게 '적병의 절반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데 사실이냐'고 묻는 선조의 질문이 그 근거다.


민심 이반의 가장 큰 원인은 평민에게만 온갖 부담을 씌우는, 부패할 대로 부패한 병역제도였다. 압록강가로 떠나는 선조를 막아선 평양 백성들의 분노로 종묘사직의 위패가 땅에 나뒹굴 지경으로 민심은 흉흉했다.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이 모두 백성에 의해 불탔고, 노비문서를 쌓아둔 장례원과 형조도 그들에 의해 불탔다. 그들은 왕의 행방을 왜군에게 알리는 방을 붙였고, 임해군과 순화군이 왜군에게 포로가 되도록 했다.


어디 민심뿐이었겠는가. 한강 사수를 명 받은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건너편에 왜군이 나타나자 병기, 총포, 기계를 강에 가라앉히고 옷을 바꿔 입고 달아나 버렸다. 도성 방어를 책임졌던 우의정 이양원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왜군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강을 건너 도성을 접수했다. 백성들도 모두 흩어져 성은 텅 비어있었다. 당시 조선의 실정이 그 모양이었다.


결국 북으로 향하는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조를 쪼개주며 명나라로 귀의하는 자기 대신 조선을 지키라 했고, 요동행을 강력히 반대하는 류성룡도 떨어뜨려 도체찰사로서 전쟁을 총지휘하게 했다. 이때 우의정 유홍은 선조를 따르라는 명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며 광해군을 따르는 막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성정이 불안정한 선조와 중국 땅에 대한 미지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류성룡은 우선 양반들도 책임을 지도록 병역제도를 개선해 이반된 민심을 다독이는 한편 조선과 명나라의 군사, 군량, 무기, 의병, 작전 등을 총괄하며 일선에서 전쟁을 지휘해 나간다. 묵묵히 선조를 따르는 이항복이 “류성룡이 아니면 누가 저 일을 해낼 수 있으랴”며 그의 인품과 능력을 인정한다.


결과적으로 임진왜란은 땅 위의 류성룡, 바다 위의 이순신이 치러낸 전쟁이었다. 이항복과 ‘오성과 한음’의 우정으로 널리 알려진 문신 이덕형, 무사 권율, 선조의 질투로 죽은 의병장 김덕령 등등 나라의 위기에 진정한 충성심으로 목숨을 걸고 나선 수많은 지사와 그들을 도운 민초들이 그 두 사람과 함께 했다.


전쟁이 끝나고 어이없는 탄핵을 당한 류성룡은 미련 없이 낙향해 ‘징비록’을 쓴다. 뒤이은 선조의 부름을 끝내 거절한다. 양반들의 기득권을 깼던 류성룡의 개혁정책들은 모두 폐기된다. 그리고 300 년 후 이씨 왕조는 무너지고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북컬럼니스트 최보기 thebex@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