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시와룡~ 인천항만공사 기자단 특파룡 10기! ‘인포터’조의 정철호입니다!
저는 이번에 인천의 시대별 역사에 대해서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요! 인천의 역사 중 ‘근대 역사’ 그리고 핵심인 우리나라 최조의 철도인 경인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합니다!
역사학계에서는 근대가 언제부터 시작되는지에 대한 문제를 두고 여러 가지 논란을 벌여왔습니다. 우리나라의 국가 성립 후에 삼국시대와 남북국시대까지를 고대, 고려 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의 개항을 근대, 그리고 광복 이후를 현대로 각각 설정하는 시대구분이 제시되어서 오늘날에 들어서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어요!
[인천개항누리길 안내도]
인천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알 수 있는 근현대사의 핵심이 되는 지역이에요. 인천 중에서도 특히 인천 중구지역은 더욱 핵심이 된답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볼 수 있는 인천 개항장 권역을 돌아보는 길인 인천 개항 누리길이 있는데요! 100여 년 전의 역사와 문화의 숨결을 간직한 이곳은 근대역사 건축물 등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입니다!
[인천개항박물관]
인천의 근대적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자 서구 공원인 자유공원, 일본 조계지의 역사를 알 수 있는 제1은행 등등 수많은 역사를 인천에서 확인하실 수 있는데요. 인천 개항 누리길에는 개항 이후 근대 인천의 면모를 학습할 수 있는 ‘인천개항 박물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천개항박물관 내부 제2전시실]
이곳은 총 4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그중 제2전시실에서는 경인 철도와 한국 철도사에 대해 소개되어 있답니다! 한국 철도사와 관련된 자료를 전시하는 공간으로 한국 최초의 경인 철도 관련 유물과 자료를 소개하고 있어요.
[인천역 앞 기념석상]
저는 이 ‘경인선’과 관련하여 여러분들과 함께 역사여행을 떠나볼 건데요! 여러분이 이를 통해 평상시에 자주 이용하던 경인선을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와 함께 다시 한 번 생각하고 고찰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자 그럼 ‘경인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까요?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개통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와 관련된 인물들]
우리나라에 철도를 처음 소개한 이는 1877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기수였고, 그 후 김홍집 또한 그 중요성을 역설하였어요. 하지만 직접 철도를 소개한 사람은 1889년 미국 주재 대리공사로 근무하다 귀국한 이하영랍니다.
미국의 신문물 중에서도 사람과 화물을 대량으로 실어 나르는 철도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정밀한 기차 모형을 가지고 황제 앞에 나아가 철도의 편리성과 쓰임새를 설명하였어요. 자주적인 개화를 꿈꾸던 황제와 대신들이 큰 관심을 보이며 이때부터 철도 도입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어요.
늦게나마 철도 건설의 필요성을 깨달은 조선은, 서울은 수백 년간 한강을 통한 수운으로 물자를 수송했으나, 개화와 산업 발전을 위해 서울을 항구와 직접 연결해주는 새로운 대량수송 수단이 필요하다 판단하였고 철도 부설을 구상합니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가 1883년에 개항되면서 서울과 제물포를 잇는 경인선 철도가 구상되었지만 당시 재정이 빈궁하여 독자적으로 철도를 부설할만한 능력이 부족했어요.
[제2전시실에 비치되어있는 기차 모형]
그로 인해 기술과 자금의 부족으로 조선 정부는 미국인 모스에게 경인선의 부설권을 넘겨주었는데요. 1897년 3월, 우각현에서 정부의 고위 관리들과 인천 주재 각국 외교관을 비롯한 3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공식이 거행되었어요.
그런데 일본은 부설권을 재취득하기 위해 조선이 정치적으로 어지럽다는 거짓 소문을 미국에 흘렸고, 이로 인해 미국 투자가들이 자금을 회수하며 모스는 자금난을 겪게 되었어요. 여기에 기술적인 난제까지 겹쳐 공사는 중단되었고, 1898년 5월 10일 공사 중인 경인 철도가 170만 2452원 75전, 당시 1백만 달러에 일본에 양도되었죠.
일본이 경인선 철도 부설권을 넘겨받은 이유는 조선의 물자를 수탈하기 위함이었어요. 즉 중부지방의 농산물과 물자를 경인선을 통해 인천항으로 옮긴 뒤 일본으로 실어 나르기 위함이었죠.
그 당시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기차를 타지 않았어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후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 즉 배일(排日) 감정이 하늘을 찔렀기 때문이죠. 백성들은 철로 위에 돌이나 장애물을 놓아 운행을 방해하기까지도 했어요. 심지어는 포인트를 돌려놓기도 했죠. 철도 회사는 고심 끝에 노선 감시원을 고용해 이를 단속하기도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어요. 또한 경인선 주변의 초가집들은 기차의 굴뚝에서 나는 연기와 함께 날아온 불티에 화재가 발생하는 경우도 있었어요.
[경인선 개통 당시의 열차]
하지만 무엇보다 그 당시엔 경인선 차비가 너무나도 비쌌어요. 당시 열차 요금은 마일당으로 계산하였는데, 3등석은 마일당 1전 5리, 2등석은 3전, 1등석은 4전 5리로 나누었죠. 따라서 노량진에서 제물포까지 1등석은 약 90전 3등석은 약 30전이었어요. 그 당시 자장면 값이 3전이었는데 지금 저희가 사는 시대의 자장면 값이 만 원이라고 하면 서울에서 인천까지의 기차 값이 거의 10만 원에서 30만 원가량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음을 알 수 있죠! 백성들은 옛 관습대로 기선이나 돛단배를 이용하기도 했고, 평소대로 가마나 말을 탔죠. 겨울철 한강이 얼어 배가 움직이지 못할 때라야 기차에 오르는 정도였죠.
때문에 경인선을 타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고, 승객이 너무 적자 철도 회사는 각 역에 사람을 두어 승객과 화물을 끌어모았어요. 회사 내에서는 종업원 1인당 월 1천5백 원의 수입을 올리면 지배인이 한 잔 산다는 유인책을 썼고, 심지어는 신문에 광고까지 실을 정도였죠!
[화열차로 손님을 끌었던 월미도 유원지]
하지만 곧 철도의 신속함, 편리함으로 인해 점차 수요가 늘어나게 되었어요. 월미도 유원지가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되자 화열차(花列車)를 편성해 전국의 관광객을 유치하기도 했어요.
광복 후에는 우리의 힘으로 새 역사를 쓰게 되었어요. 국토는 분단되었고 철도 역시 두 동강이 나고 말았지만 전후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인해 경인선도 점진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어요. 증기기관차 – 디젤기관차 – 기동차 – 전철로 차량이 개선되면서 비로소 철도에 ‘서비스 사업’이라는 개념이 도입되었죠.
오늘날 경인선은 인천까지 서울의 통근권을 확대시켜 놓는 등, 서울∼인천을 잇는 운송체계에 있어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경인선 철도가 놓인지 100여 년, 인천은 지하철 시대를 열었고, 그와 함께 우리나라 철도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한국 철도 최초 기공 기념비]
여러분 재밌으셨나요? 100여 년의 세월 동안 우리 민족의 아픔을 지켜보면서 서민들의 온갖 사연을 실어 날랐던 우리의 경인선 철도. 1897년 3월 22일 인천부 우각현(현 도원역 부근)에서 가진 한국 철도의 최초 노선인 경인선 기공식을 기억하는 조그만 기념비만이 그 사연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하지만 이 지점은 실제 경인 철도 1차 기공지와는 전혀 다른 곳이에요.)
제가 처음에 말했듯이, 여러분이 평소에 이용하는 경인선을 대한민국 근대 역사와 함께 고찰해보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이만 대한민국 인천 근대의 역사 ‘경인선’에 대한 이야기를 마쳐보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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