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춘은 1905년 건립된 2층 건물로 전체적인 건물형태가 '목(目)' 자형으로 각각 연결된 건축물 사이에는 중정이 구성돼 당시 청(淸)조계지의 건축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905년 스물두살의 청나라 청년 우희광은 청나라 조계지에 음식점과 호텔의 혼합형 숙식업소 산동회관의 문을 열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 1912년 2월 청나라 황제가 폐위되고, '중화민국'이 건립되자 우희광은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 수립을 기념하여 1912년 봄 산동회관을 '공화춘(共和春)'으로 개명하게 됩니다. 공화춘은 '공화국 원년(元年)의 봄(春)' 이라는 뜻 이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먹는 한국식 자장면은 인천에서 시작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기원입니다. 자장면을 정통 중국요리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인천 태생의 중국 음식인 자장면이 남녀노소에게는 물론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음식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1883년 인천개항과 함께 형성된 청나라 조계지에는 청나라 관원, 상인, 노동자들로 넘쳤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한 숙박업과 요식업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됩니다.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에 중국 산둥지방에서 건너온 중국인 쿨리들과 부두노동자들의 간편식 끼니였다는 것입니다. 이 음식이 처음 공화춘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공화춘은 객잔(客棧)이라 부르는 여관 비슷한 영업도 함께 하였기에 쿨리들이 합숙을 했을 가능성과 그에 따라 집단 급식용 자장면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으나, 이런 사실을 전하는 중국인 또는 한국인 증언자가 일찍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공화춘 원조설은 신빙성이 떨어집니다. 





아마도 가난한 노동자들이 검소하게 끼니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 알려지기는 공화춘은 당시 경인간 최고급 요리점으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 쿨리들은 답동 등지의 합숙소 같은 곳에서 무리를 지어 생활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여전히 공화춘 원조설에 의문이 갑니다. 당시 청나라 조계지에서 '자장면'은 흔한 음식이었고, 공화춘에서도 판매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자장면은 공화춘이 아닌 차이나타운에서 20세기 초부터 판매되었다는 것입니다.


공화춘이 성업을 이루자 화교 유지들은 인근의 대불호텔을 사들여 북경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중화루'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북경에서 건너온 주사부라고 불리던 일급 주방장이 있어 전통 북경요리를 맛보려고 서울을 비롯 각지의 미식가들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1차 세계대전에 따른 호황으로 청관 거리에 동흥루가 연이어 문을 열면서 인천은 청요리의 본산으로 자리 잡았다고 합니다.






한국 화교의 쇠퇴와 더불어 문을 닫은 공화춘은 20여년 동안 폐허처럼 방치되어 있다가, 한중수교 수립으로 이 일대가 번성하며 다시 활로를 모색중에 2007년 인천광역시 중구의 지역구 개발정책에 따라 '자장면 박물관'으로 리노베이션 되었으며, 현재는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