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개항 130주년 인천항 사진 전시회


안녕하세요! 올해가 인천 개항 130주년이라는 사실은 지난번 포스팅을 보신 분들이라면 다들 알고 계시겠죠? 그래서인지 지금 인천에서는 다채로운 행사가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 다녀온 곳은 인천 개항 130주년을 맞아 인천항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인천항 사진 전시회입니다. 5월 28일부터 6월 2일까지 인천 중구에 위치한 인천 개항 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사진전이 열릴 계획입니다. 이번 사진전은 인천항운노동조합이 소유하고 있는 인천항과 관련된 사진 50여점을 시민들에게 무상으로 공개하는 형식입니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사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아 직접 다녀왔습니다. 지금부터 인천항의 역사! 사진을 통해 함께 하실까요?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인천 개항 박물관입니다.)



인천 개항 박물관은 중구청과 차이나타운 사이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인천개항박물관은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을 근대건축물로서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전시가 가능한 박물관으로 보수하였습니다. 사진전이 열리고 있는 기획전시실은 바로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진전은 총 2층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1층에는 자원봉사자 분들도 계십니다.)



인천항은 1883년 고종 20년에 일본과 맺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개항하였으며 우리나라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인 최초의 항구로 6.25전쟁 등을 거치면서 많은 피난민과 서민고의 생활고를 해결하는 삶의 애환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인천항 바로 옆에 위치한 개항장은 한적한 어촌에 불과했던 현재 중구 해안의 제물포로 강제 개항이었지만 우리나라 개화의 선구지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인천항 주변으로는 다양한 서구의 건축물과 대한민국 최초, 최고, 유일의 근대문화유산이 조성되었습니다. 서구와 최초로 국교를 체결하고, 최초의 근대식 공원, 호텔, 극장, 학교, 철도, 화폐, 야구, 축구 등 수많은 근대문물의 역사와 호흡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1880년대 개항 초기 인천의 모습입니다.)



(1880년대 개항 초기 제물포 부두 선착장의 모습입니다.)



인천에는 개항초기부터 청국, 일본을 비롯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등 구미 여러 나라 상인 의 친출이 활발하였습니다. 1896년에는 재한 외국인 총수가 15,000명 이었는데 그 중 3,908명이 인천에 거주하였고 외국인 상관수도 전국 258개중 48개가 인천에 있었다고 합니다. 이후 무역이 성행한 인천항은 1893년에서 1907년까지 한국무역총액의 50% 이상을 차지하는 국제항으로 성장하였습니다. 



(1904년 인천 부두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사진입니다.)



(1911년 처음으로 시작된 제물포항 제1도크 공사현장 사진입니다.)



인천항은 입지적 중요성과는 달리 조수간만의 차이가 최고 10m에 달하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할 수 있는 항만 개발 사업이 필연적이었고, 갑문식 갑거 시설 확보를 주요 추진계획으로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계획에 따라 1911년 6월 현재 제 1부두 자리에서 국내 처음으로 본격적인 인공항만 축조와 선거(도크)설비 등의 공사가 착수 되었습니다. 조수간만의 차와 상관없이 선박의 입출항 및 접안, 그리고 하역이 가능한 2중 갑문식을 축조하였습니다. 공사가 시작한지 7년만인 1918년 10월 최초의 근대적 갑문식 전천후 항만시설인 제 1선거가 건설되었습니다.


(완성된 갑문을 통해 입항하는 선박의 모습입니다.)



(1930년대 인천항 제 1도크의 모습.)



1935년에는 일본이 중국대륙진출을 위해 8,000톤급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제 2 선거(도크)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이 터져 공사가 중지되었습니다. 30%정도의 공정에서 중단되었다고 하네요.



(1960년대 인천항의 모습입니다. 점차 근대적 모습의 인천항 모습과 가까워져 갑니다.)



해방 이후 정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으로 인천항의 해상물동량은 계속 급증하지만 항만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에 정부는 하역 및 대형선박의 접안능력을 높이기 위하여 66년부터 74년도까지 최대 5만 톤급 선박까지 접안이 가능한 제2 선거(도크) 건설을 추진하였습니다. 공사 내용은 월미도와 소월미도 사이에 갑거를 구축해서 구(옛) 항로를 없애고 인천 내항 전체를 선거(도크) 화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내항의 도크는 동양 최대이며 세계에서 6번째로 설비된 갑문이라고 합니다. 갑문은 모두 2개인데 하나는 5만 톤급 선박 1척이, 또 하나는 1만 톤급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초현대식으로 건설되고, 연간 하역능력은 1,000만 여 톤 (972만8,000톤)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1960년대 후반 인천항 공사 현장 사진입니다.)



(1970년대 갑문 물막이 제방 제거 작업현장의 사진입니다.)



(외항으로 이송중인 최초의 수출 자동차의 모습입니다.)



이후 제 2선거(도크)의 완성으로 대형선박의 입출항으로 인해 물동량이 또 다시 급증하자 정부는 1,5,6,8 부두 건설, 창고 및 갑문시설 보강, 석탄전용부두 축조 등을 완공해 현재의 내항의 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오늘날 인천항의 모습)



사진과 함께 살펴본 인천항의 역사는 일찍이 근대문명 도입과정에서 우리나라 근대문명을 받아들이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수탈의 역사를 지닌 항으로, 해방이후에는 미군정치하의 군수 및 지원물자를 취급하는 항으로서 그 이후 1960~ 1980년대는 근대화의 수출입 무역항으로서, 지금은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의 대중국 등의 둥북아 물류중심항만으로 우리나라의 근대화 발전에 한축을 이뤘다는 측면에서 역사적으로도 깊은 의미를 지닌 항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인천개항박물관에서는 인천항의 역사를 담은 여러 가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전부를 이 글에 담을 수는 없으나 충분히 인천항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전을 통해 인천항에 대한 시민들의 관심과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시민에게 사랑받는 인천항의 밝은 미래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