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룡~ 해룡이에룡~

여러분들은 우리가 대통령을 직접 투표해 선출할 수 있게 된 계기를 아시나요?

바로 ‘6·10 민주항쟁덕분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오늘 해룡이와 ‘6·10 민주항쟁에 대해서 공부를 해보겠습니다!

 

 

 

6·10 민주항쟁이 일어난 이유는?

1987413, 전두환 정권은 헌법을 그대로 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합니다.

 

 

당시 헌법은 선거인단에서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제였는데요.

이에 반대하는 시민들은 호헌 철폐독재 타도’, ‘직선제 요구등을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박종철 군이 불법체포 당해

심문을 받던 도중 경찰의 폭행, 극심한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정부는 ! 치니, ! 하고 죽었다며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했지만

부검의의 증언으로 물고문과 전기고문이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이를 계기로 박종철 군 추모집회와 정부 규탄대회가 동시에 열렸고,

자연스럽게 6·10민주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게다가 198769, 전두환 정권의 독재 타도와 5·18 진상 규명을 외치며 시위에 참여했던

이한열 열사가 시위 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는데요.

 

 

로이터 통신 기자가 학우의 부축으로 시위 현장을 빠져나가는 이한열 열사를 촬영해 보도하면서

이한열 열사의 사건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됩니다.

 

처음 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시위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분노가 더해졌으며,

그 결과 일반 시민들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습니다.

이를 증명하듯 610일부터 29일까지 1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로 나오는 등 시위는 불타올랐습니다.

 

인천의 민주항쟁

인천 역시 전국에서 벌어진 6·10민주항쟁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인천 시위의 중심에는 바로 인하대학교 학생들이었는데요.

인하대학교 학생들 외에도 가톨릭 노동 청년회, 인천 기독 청년 협의회 등의 단체들이 모여

부평역 앞과 동인천역 앞 등 곳곳에서 집회와 시위를 벌였습니다.

 

 1987610,

 인하대학교 내 통일 광장에서 박종철 군 고문 살인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 대회출정식을 개최하며

인천지역도 6·10 민주 항쟁을 시작하였는데요.

1천여 명의 학생으로 시작한 시위는 5일 후인 615일에 1만여 명이 모이는 등 그 규모가 점점 커졌습니다.

 

 

특히 26, 부평역 광장에서 열린 범시민 평화 대행진에서는 경찰과 충돌이 있었지만

시위대는 경찰버스에 연행된 사람들까지 구출할 정도로 강력한 투쟁 의지를 보여줬었습니다.

 

지금도 부평역 쉼터 광장에 가면 6·10민주항쟁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요.

바로 6·10민주항쟁 기념 표석입니다.

표석에는 여전히 6·10민주항쟁의 뜨거운 외침이 들리는 것만 같은 글귀가 적혀있답니다!

 

호헌 철폐! 독재 타도!

19876월 인천에 울려 퍼졌던

그때, 그 자리, 그 사람들

 민주주의를 향한 뜨거운 외침을 기억합니다.’

 

6·10 민주항쟁의 결과

결국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항복한 전두환 정권은

대통령 직접 선거와 국민의 기본권 보장, 구속되거나 연금된 정치 인사들의 석방,

평화적 정부 이양의 실현 등을 내용으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진정한 6월 민주항쟁의 의의는 6·29 민주화 선언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바로 시민들의 민주주의 의식을 크게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인데요.

노동자, 농민 등 사회 여러 계층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이어졌으며

다양한 시민운동도 활발해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해룡이와 함께 6·10 민주항쟁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요.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워온 분들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룡이도 항상 감사하며 잊지 않고 꼭 기억할 거예요!

다음 시간에는 더욱 재미있는 주제로 찾아올께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