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적 금융기관은 1878년 개설된 일본제1은행 부산지점이었습니다. 일본제1은행은 풍부한 자금력과 선발주자로서의 이점이 있어 개항기 조선의 금융시장에서 압도적인 지배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인천이 개항한 1883년에는 부산지점 인천출장소를 개설하고 한국에서 생산되는 금괴(金塊)와 사금(砂金)을 매입하는 업무를 대행하였습니다.





또한 서울과 인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일본영사관들의 금고역할까지 하게 됨에 따라, 인천출장소는 1888년 9월 인천지점으로 승격되었습니다. 나아가 서울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풍부한 상업자금을 공급받기 위해 유치 노력을 기울인 결과 한달 뒤인 10월 인천지점 서울출장소를 개설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제1은행의 지점 및 출장소는 개항장에서 관세 및 수수료를 징수하고 그 은행 자체의 어음을 한국정부에 납입하게 함으로써 일본은화는 점차 유통계에서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청·일전쟁을 수행 중인 일본군은 군수물자와 인력의 조달을 위해 막대한 양의 한전(韓錢)이 필요했습니다. 일본군의 한전 수요는 한전 시세를 끌어 올렸는데, 이는 일본군의 전비 부담을 가중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아예 일본화폐를 법화로 직접 통용 할 수 있도록 요구하였고, 당시 친일 개화파정권이 부응함으로써 「신식화폐발행장정」에 일본화폐의 통용을 인정하는 취지의 조항이 삽입되었습니다. 제1은행은 개항장에 진출한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하여 예금과 대출에 주력하였습니다.



* 일본 은행이름 앞에 숫자가 붙은 것은 1872년 실시된 일본의 국립은행 조례에 의해 인가된 허가번호에 따라 각 은행을 ‘제**국립은행’이라고 명명한 데서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국립이라고 해서 국가가 운영한 것은 아니고 국가의 통제를 받는 민간업자가 설립하여 운영하였습니다. 



1905년 이후 제1은행이 화폐개혁을 전담하면서부터 우리나라의 중앙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자 이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을 의식하여 1909년 한국은행을 중앙은행으로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1909년 한국은행이 창립되면서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변경되고, 1911년 한국은행이 조선은행으로 바뀜에 따라 조선은행 인천지점이 되었습니다. 은행의 명칭을 개칭하고 중앙은행으로서의 업무를 수행하게 하였지만, 중앙은행으로서의 역할보다는 제국주의 침략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강제하였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광복 후 한국은행 인천지점으로 개편되었다가 은행이 이전함에 따라 조달청 인천사무소 청사 등 여러 용도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현재는 인천개항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