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예문(虹霓門)은 중구 홍예문 1길과 2길이 만나는 고개의 정상부에 서 있는 무지개 모양의 동그란 돌문이고, 이 돌문 위로는 응봉산 정상 자유공원과 내동을 연결하는 길이 지난다.





일제강점기 인천항에서 홍예문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경찰서와 공회당 같은 중요한 시설들이 있었고, 홍예문의 건설은 일본 공병대가 담당할 만큼 일본인들에게는 중요하고 특별한 관심거리였다. 일본 정부는 조계 설정 당시 한국 정부가 제시한 해안지대를 넓어서 관리하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중앙동과 관동 일부 약 2.31㎢만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개항 2~3년 만에 정치·경제적인 이유로 인천에 들어오는 일본인들이 증가하여 조계는 곧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전동, 신생동, 내동으로 거주 지역을 확장하고 해안을 매립하였으나 거주 공간의 부족을 해결할 수 없어 다시 현재 만석동으로 거류 지역을 확대하려 하였다.

당시에 우마차와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일본조계가 있던 항구 주변에서 만석동으로 가려면 지형적인 이유로 북서 해안선을 따라 갈 수가 없었고, 현재 경인철도의 노선과 같이 용동을 거쳐 화평동으로 우회하여야 했으나 최단거리인 북서 해안선을 따라 도로를 건설하기에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거리를 단축시키고 노력이 적게 드는 노선을 선택하여 공사를 진행하게 되었고 그것이 홍예문의 건립이었다. 홍예문을 세워서 아래로는 만석동으로 가는 길을 뚫고 홍예문 위로는 각국지계와 측후소로 가는 길을 마련하기로 하였다.

결국 1905년 경부선과 경의선 부설 공사를 위해 인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 공병대에 의해 착공되었다. 공사는 예상하지 못했던 굳은 암반층의 노출로 인명피해, 비용 증가 등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마침내 50㎝ 정도의 큼직한 직육면체 화강암을 폭 4.5m, 높이 13m, 통과 길이 8.9m 쌓아 올리는 공사가 1908년 완공되었다.





홍예문의 설계·감독은 일본이 맡았는데, 유명한 중국의 석수장이들이 공사에 참여했고, 흙일과 잡일은 기술도 돈도 없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홍예문 공사에 참여했던 중국 사람들은 멀리 산둥반도에서 돈을 벌기 위해 건너온 가난한 노동자들이었다.

3년여의 공사기간을 거쳐 만든 홍예문은 내리교회 쪽에서 성공회 내동교회 고개를 넘어 자유공원 어귀까지 높은 길을 이어주는 산길의 육교로 지금까지 이용되고 있으며, 여름철에는 시원한 휴식처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에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배경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어 그 유명세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사진 설명. 드라마 "그 겨울, 바람이 분다" 속 홍예문 모습)



1960년대만 해도 홍예문 정상의 난간에 기대서서 인천항은 물론 맑은 날에는 팔미도, 대부도, 영흥도, 용유도 등 여러 섬을 바라다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또 여름철에는 좁은 문구멍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으로 많은 사람들을 모으기도 하였다고 한다. 홍예문 돌벽을 담쟁이덩굴이 뒤덮고 있어 계절마다 색다른 분위기로 자아내며 오랜 세월 동안 시민들의 사랑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