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6년 체결된 조불수호조약으로 한국교회는 종교의 자유를 얻게 되고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리외방전교회의 선교활동이 공식화됐습니다. 당시 제물포로 불리던 인천에는 1889년 7월 1일에 파리외방전교회의 빌렘(J.Wilhelm,홍요셉) 신부가 파견되어 제물포교회(현 답동성당)를 창설하고 포교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홍 신부는 마침 병인박해를 피해 고잔 지역에 정착한 민종황(요한) 일가한테 답동 언덕 일대의 10,600㎡(3,212평) 부지를 기증받아 1890년 7월에 성당 건축 정초식을 갖고 일부 토지를 매각하여 본격적인 건축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홍 신부는 곧 신학교로 떠나게 되어 성당건축을 마무리 짓지 못했습니다. 후임의 제2대 르비엘(Emile Le.Viel : 한국명 신삼덕) 신부는 1891년에 경리부 건물 1동을 건립하며너 이곳을 임시 성당으로 사용했습니다.
현재의 건물이 세워진 것은 제3대 서요셉 신부 시절인 1897년 7월입니다. 1894년 5월 코스트 신부와 샤르즈뵈프(Charge beouf : 한국명 송덕망) 신부가 인천에 와 고딕식 성당의 기초 공사 설계도를 그리고 1895년 8월에 본격적인 성당 건축에 착수하여 일년 만에 종탑과 벽돌 공사를 완성하고, 다시 일년 뒤인 1897년에 공사를 마무리 하였습니다. 당시 종탑은 인천시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교회의 상징물이었으나 탑 위에 종은 없었습니다. 성당이 신축된 지 3년 뒤인 1900년에서야 신자들의 기부금으로 3개의 종을 설치하였습니다.
그 후 답동성당은 1934년 4월에 개축 공사를 진행하여 건물의 형태에 큰 변화가 나타납니다. 신도가 나날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제4대 드뇌(Eugene Deneux, 한국명 전학준) 신부는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하여 확장공사를 시행하였습니다. 이 공사는 기존 성당 건물의 외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난공사였기 때문에 무려 4년 2개월 만인 1937년 6월 30일에 연면적 1,013.8㎡(307.2평)의 성당을 준공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답동성당의 본당은 치자렛(Chizallet) 신부가 개축 공사를 하면서 로마네스트 양식으로 변형하였으나 비교적 옛 모습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성당의 평면은 십자형으로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하여 중요한 곳에는 화강암을 사용했습니다. 정면의 중앙과 양 옆으로 출입구가 나 있고, 가운데 출입구 위에 장미꽃 모양의 창을 설치했습니다. 건물 중앙에 큰 탑을 두고 경사진 지붕으로 날개를 달고, 끝부분에 장식적인 작은 탑을 두고 있는데, 이 모습은 20세기 초에 지어진 우리나라 교회건물의 보편적 형식입니다.
답동성당은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교육과 의료 분야에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1894년에 근대 아동 복지 시설의 효시로 알려진 해성보육원을 설립하여 오늘날까지 많은 어린이들을 돌보고 있으며, 1900년 9월 1일 인천사립박문소학교를 설립하여 신자들과 가난한 이웃의 자녀들에게 초급과정의 교육 기회를 제공하였습니다. 1929년 5월에는 박문유치원을 설립했고 1937년 7월에는 현 인천박문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소화고등여학교를 인수하여 운영하며 인천교육 발전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또 1939년 4월엔 해성병원을 설립하여 극빈자 치료 사업도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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