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식 지명은 아니지만 인천의 '배다리'는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친숙한 동네입니다. 배다리는 한국근대사의 전개 과정 속에서 근매문화 역사의 근원지로 오늘날의 금창동 일대를 말하는 데, 개항 이후 몰려온 일본인들의 요구로 제물포 해안에 개항장이 조성되면서 이곳에서 밀려난 조선인들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이 곳에는 근대 개항장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데, 그 중 하나가 현재 인천세무서 옆에 위치한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입니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인천 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세기 말 미국 감리교회가 파견한 여자 선교사들의 합숙소로 이용하려고 지은 건물이며, 지금의 인천세무서는 남선교사합숙소로 사용되었습니다.



(사진 설명. 여선교사합숙소로 쓰였던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 



1908년 간행된 '인천개항25년사'에 따르면 당시 인천에 머물던 외국인은 영국, 미국 등 7개국 58명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선교사는 영국, 미국, 프랑스에서 파견했는데, 영국은 여자만 2명, 프랑스는 남녀가 각각 2명, 미국은 남녀가 각각 3명과 2명이었습니다.


인천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이 늘어나며 이들이 거주할 주택이 필요하여 선교사들의 숙소가 마련되었습니다. 선교사들의 숙소에 대해 '개항과 양관역정'에서는 "영화여자국민학교 동쪽 나즈막한 언덕 위에 낡은 형식의 2층 벽돌집(서양식 건물) 한 채가 썩 깨끗하고 아담하게 앉아 있다. 20년전 만 해도 윤이 자르르 흐르는 잔디밭이 언덕 전체를 덮고 있었고, 멋지게 손질된 수목들 사이에 세 채의 서양식 건물이 삼각형의 꼭대기 지점마다 자리를 잡고 있었다. 다같이 푼수 없이 높다랗기만 하던 검정색 함석지붕에 붉은 벽돌의 벽면을 지녔고 간소한 '베란다'를 갖춘 거의 같은 형식의 집들이었으며, 건축연대는 알 수 없다."면서 존스목사가 내리교회에서 복무(1892~1894)했던 전후에 사택 세 채가 건축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내리백년사'에 "1897년에 우각리(현 창영동)에 선교사주택을 건립"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존스 목사가 내리교회에서 복무한 이후에 건축된 것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세 채의 서양식 건물이 동시에 세워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공론(Korea Review, 1901년 1월호)에 제물포에는 로마가톨릭선교회, 영국선교회, 감리교감독선교회라는 3개의 선교회가 있다 했는데, 그 중에서 감리교선교회는 "도시 끝 쪽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인근에 선교사를 위한 주거공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감리회 한국여선교사의 1905년 '연례보고서'는 여선교사합숙소는 1905년 초에 시작해 같은 해 11월에 완공하였는데, 합숙소의 기능뿐 아니라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선교사들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으며, 2층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지하에는 보일러실과 창고를 두고, 1층은 여성교인 지도자를 교육하는 곳으로, 2층은 선교사와 매일학교 교사들의 침실로 사용했다고 전합니다. 위 내용을 종합해 보면 1897년 남선교사숙소가 그리고 1905년에 여선교사합숙소가 건축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설명. 남선교사합숙소로 쓰였던 인천세무서 건물)



지금은 인천세무서 청사가 된 남선교사합숙소는 1942년경 정미업자인 주정기 씨가 매수하여 지주한 바 있었으나, 다시 조선알루미늄공업주식회사가 사들여 합숙소로 사용하였습니다. 해방 후 한 동안 경기도경찰전문학교의 사택으로 이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1955년경 신설된 동인천세무서 청사로 개축되었고, 현재 인천세무서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선교사합숙소는 6·25전쟁 후 미군이 사용하다, 1956년경 기독교사회관이 들어섰습니다. 이 회관은 미국감리교회 여선교부가 운영하였는데, 고프(Maude Goff) 여선교사가 이를 창설하여 주관하며, 사회 소회 계층을 위한 봉사활동을 하였습니다. 교육기회를 갖지 못한 극빈 자녀들의 교육과 계몽, 혼혈아 양자들의 입적, 영아 보건 등의 사회사업을 그 목적으로 활동하였습니다.





현재 인천기독교사회복지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인천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지하 1층, 지상 2층, 연면적 468.6㎡(142평) 규모로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외형은 간소한 상자형으로 양철로 된 지붕구조가 독특하며, 벽체는 빨간 벽돌을 석회 몰타르로 쌓은 근세 북유럽의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