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부끄러워야 이룬다



<부끄러움의 깊이>



김명인 지음ㅣ빨간소금






산문집 ‘부끄러움의 깊이’의 저자 김명인은 인하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나이 육십 언저리의 젊지 않은 교수다. 인하대는 인천에 있다. 같이 사는 동네에 배울 것이 많은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은 돈 들이지 않는 자산이자 자부심이기도 하다.

잘 써진 산문집은 소설이나 시 같은 문학과 차별화된 독서의 가치가 몇 가지 있다. 특정 장르에 대한 호불호를 따질 필요가 없다는 것, 저자의 평소 생각과 경험을 전달하는 ‘서술’이라 어렵거나 추상적이지 않다는 것, 다양한 이슈와 관점에서 나의 삶과 생각을 비교 성찰해 볼 수 있다는 것 등이다. 문학평론과 시사칼럼을 꾸준히 써오는 김명인 교수의 산문집이 그렇다.


 저자는 독립운동가이자 테러리스트로서 짧고 굵은 삶을 살았던 김산의 전기 <아리랑>(님 웨일즈 지음) 중 주인공 김산의 유언 같은 일부를 길게 인용(한 부분이 너무 길어 여기에 옮길 수는 없지만)하면서 “혁명가 김산의 불퇴전의 삶과 죽음에 낭만적 동경을 투사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참 단순명쾌한 삶이었구나 하는 생각, 내 표현대로 하자면 ‘신탁 받은 자의 삶’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앞서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어떠한 신내림의 삶도 불가능한 지금 이곳의 현실에서 김산의 삶을 읽는 것은 내게는 이제 동경의 확인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질문이었다. 도달해야 할 지점을 가리키는 어떠한 지도도 명령도 없는데, 그렇다고 나날의 싸움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이 상황은 무엇인가 하는” 고뇌 어린 현실 앞에서 젊음이 지나버린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행간에 숨은 답은 ‘(나라의 암담한 현실에도) 희망을 버리지 말자, 나 자신에게 승리하자’는 반성과 결의로 읽힌다.


 이 대목이 특히 눈에 띈 것은 필자 역시 졸저 <놓치기 아까운 젊은 날의 책들>에서 <아리랑>을 한 목록으로 다뤘기 때문이다. 필자는 “김산이 겨우 14살(지금의 중학교 2학년)의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15살에는 무일푼으로 일본을 떠나 하얼빈에서 남만주의 군사학교까지 7백리, 30일 간의 대장정을 펼치는 장면은 대견, 대담하다 못해 차라리 처연한 대서사”라서 장대한 꿈을 가진 이 땅의 청춘들에게 읽어보길 권장했었다. 사려 깊은 학자와 ‘김산’이라는 같은 인물에 대해 출발점과 도착점에서 각각 공감하고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아마도 이십 대 청춘이었을 때 김산의 삶에 감동했을 저자,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김산에게서 그 감흥을 찾지 못하는 장년의 저자는 “억울하고 안타까운 것이 많은 삶이었다. 이제는 나 자신보다 남의 고통 때문에 더 많이 우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것은 아홉 살 그 비 오는 날의 방황에서 비롯된 깊은 자기연민이 가까스로 승화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성회비 때문에 쫓겨난 일을 가족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집을 나선 그 비 오는 날의 상처받은 어린 영혼은 이건 아니다, 이렇게 살 수는 없다고 수없이 되뇌며 오십 년 동안 여전히 비 오는 겨울 골목길을 헤매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독자인 나는 ‘남의 고통 때문에 더 많이 우는 저자, 그러한 삶에 익숙해진 저자’의 농익은 삶과 대비되는 나의 부끄러운 삶을 반추하며 비 오는 한여름 낮의 골목길을 헤맨다.


 그러한 학자에게 요즈음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헬조선’이라는 개념어는 놀라움 자체다. 대학 교수 김명인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계급적,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이를 세심하게 분석한 후 “불안과 분노로 무장한 젊은 세대들에게 진보/보수, 여/야의 구분은 무의미하다. 이들의 인식 구조는 아직 일차원적이지만 모든 투쟁은 일차원적 평면에서 시작해 다차원, 입체적 방향으로 나아간다. 헬조선, 무서운 분노의 힘이 응집된 말이다. 이 말이 어떤 행동으로, 또 어떤 사건으로 발전하게 될지 그 귀추가 자못 주목된다”고 염려한다. “나도 어려웠다. 그러나 불굴의 ‘노오력’으로 오늘의 성공에 이르렀다”며 ‘노력 하지 않는 젊은이들의 유아적인 투정’으로 이를 인식하는 소위 ‘꼰대’들과는 사뭇 다른 ‘어른’의 모습이다.


 나이가 들어봐야 알게 되는 지혜, 그제서야 새삼스레 느끼는 부끄러움, 다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한 삶을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승리하고자 하는 결기가 국문학을 전공한 ‘꼬장꼬장’한 교수의 개인사와 이 나라에 닥친 첨예한 문제들에 투영돼 독자의 결기를 재촉한다. 그때의 결기란 성공학을 다루는 자기계발서를 읽고 난 후에 다지는 그것이 아니다. 지금보다 ‘탁월한 사유의 시선’을 얻고자 하는, 보다 정중하게 이 사회를 대하는 지성인이고자 하는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