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어떻게 보면 조금 딱딱해 보일지도 모를 역사 이야기를 한 번 해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우리나라의 근대식 화폐가 언제, 어디에서 처음 제조되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우리나라 근대 화폐 역사는 개항 이후 대동 은전이 발행된 1882년부터 시작이 된다고 해요. 하지만 근대 화폐가 실질적으로 제조된 것은 전환국 설치 후 1891년부터 은본위 화폐제도를 공포하고, 인천 전환국에서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 등의 근대 화폐를 제조한 것이라고 하네요! 여기서 전환국은 과연 과거에 어떤 기관이었을까요?

[옛 인천 전환국]

 ‘전환국’(典圜局)‘이란 1883년(고종 20)에 설치되었던 상설 조폐기관을 의미해요. 다시 말하자면 조선 말기 화폐의 발행을 주관하던 관청을 말하는데요. 지금의 인천 중구 동인천동 주민 센터가 바로 예전에 인천전환국이 있었던 자리라고 합니다. 그래서 방문하게 된 동인천동 주민 센터 앞에는 ‘구적 한국시대 조폐소 지적(舊蹟韓國時代造幣所地跡)’이라는 표지석이 있었어요. 이는 이곳이 인천에서 화폐를 처음 만든 자리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하네요!

[동인천동 주민 센터 앞 인천 전환국 터]

[구적 한국시대 조폐소 지적]

 사진에서처럼 인천 전환국 터는 커다란 나무와 함께 잘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는데요!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우리나라에서 근대 화폐를 제조하기 위해 설치한 전환국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환국은 1883년 서울에 설치한 경성 전환국이 시초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곳에서 신식 화폐를 제조했지만, 제조 기술의 부족 및 재고 조달의 어려움 등의 이유로 1892년 동전의 원료인 ‘동’의 수입과 운반이 용이한 인천으로 전환국을 이전하였다고 해요. 그리고 그 해 11월부터 근대식 화폐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고 하네요!

 당시 인천 전환국에서는 다섯 종류의 동전(5량, 1량 은화, 백동화, 적동화, 황동화)을 발행했습니다. 이때 만들어졌던 동전이 인천개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고 하여 저는 해당 화폐 및 인천 전환국의 역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인천개항박물관으로 향했어요~

[인천개항박물관 전경]

 인천역(차이나타운)에서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위치해 있는 인천개항박물관은 성인 기준 입장료 단돈 500원이면 입장할 수가 있었습니다. 인천개항박물관은 총 네 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요. 그중 제4실이 바로 ‘인천 전환국과 금융기관’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답니다. 하지만 저는 제4실만 관람한 것이 아니라 추천 경로를 따라 제1실부터 2, 3실까지 모두 관람한 후에 제4실로 들어섰어요! 인천의 다른 역사들도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에요!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호텔인 대불호텔, 우편사업에 대한 역사,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 초등학교인 영화학당, 미두취인소 등 다양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으니 시간 내어 방문해 볼 것을 추천합니다!

[인천개항박물관 내부 구성]

  제1, 2, 3실을 지나서 들어선 제4실 내부에는 개항기 복권과 일본은행 지불권 등이 전시되어 있었어요. 또한 제가 이곳을 방문한 목적인 인천전환국에 대한 자료와 인천 전환국에서 주조하였던 화폐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인천개항박물관 제4실에 전시되어 있는 화폐]

 인천 전환국에서는 1882년부터 1900년까지 5냥 은화, 1냥 은화, 2전 오푼 백동화, 5분 적동화, 1푼 황동화 등 5종의 압인식 화폐를 제조하였다고 해요. 아래 사진이 바로 전환국에서 주화를 압인할 때 사용하던 기구입니다. 전환국 내에는 총 9대의 압인기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하네요~

[근대주화 압인기 복제품]

 이곳에서는 주로 보조화폐로 백동화를, 명목상으로는 은화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아래 자료를 보더라도 백동화의 비중이 가장 높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인천전환국의 화폐 주조액 단위]

 이러한 인천 전환국은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나 당초 지금(地金) 제공을 약속했던 오사카 제동 회사(製銅會社)가 1893년 1월 지금 제공을 거절하게 되면서 화폐 제조는 중단되게 됩니다. 한편, 1894년 갑오개혁을 계기로 문란해진 화폐제도를 바로잡기 위해서 ‘신식화폐장정’을 공포했는데요. 그러나 본위화폐인 은화보다 이익이 더 큰 백동화가 남발되고, 그 당시 외국 돈의 유통이 인정이 되어 일본 화폐까지 국내에 유통되면서 화폐 질서가 더욱 문란해지는 결과를 낳았다고 하네요.

 이후 경인 철도가 완공되어 화물 운송이 편리해지자 1900년에 다시 용산으로 전환국을 이전했고,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다 결국 화폐 제조를 일본 오사카 조폐국에 넘겨주는 것을 끝으로 21년이라는 역사의 막을 내렸습니다.

[인천전환국 주변 풍경]

 한때 인천 전환국에서는 화폐에 대조선(大朝鮮)이라는 문구를 새기기도 했었는데요.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와 일본인들의 강력한 반발에 의해 아주 잠깐 발행을 중지한 적이 있었다고도 해요! 또한 당시 인천 전환국 주변에는 양조장 건물도 많고, 상당히 번화했기 때문에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자신이 인천전환국 주변에 사는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네요~ 이러한 인천 전환국 건물은 1926년에 2층 규모의 교사를 신축하면서 헐게 되었고, 현재 이곳에는 앞서 말씀드렸듯이 동인천동 주민 센터가 들어서 있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근대 화폐 역사의 근원지였던 ‘인천 전환국’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제는 표지석만이 남아 그 자취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되었지만, 약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인천에서 근대 화폐 탄생에 중요한 역할을 해냈던 점에서 충분한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화폐의 근원은 어디였을까 항상 궁금했었는데요! 이번 기사를 통해 저를 포함한 여러분 모두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화폐를 제조했었던 인천 전환국에 대해 머릿속으로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