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 인천항 개항, 그 시기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사건[1] - 고종, ‘보빙사미국에 파견

715 조선, 최초로 서방 세계에 민영익,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등을 대동하여 미국으로 보빙사를 파견.

918 조선에서 파견한 보빙사 일행이 뉴욕에서 체스터 A. 아서 미국 대통령과 첫 회동.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인이 미국에 첫 발을 내민 것은 1883년 일입니다. 당시 조선 최고의 엘리트 청년 8명으로 구성된 견미외교사절단, ‘보빙사가 그 주인공입니다.

구성원은 전권대신 민영익(閔泳翊), 부대신 홍영식(洪英植), 종사관 서광범(徐光範), 수원 유길준(兪吉濬고영철(高永喆변수(邊燧현흥택(玄興澤최경석(崔景錫) 등과 중국인 오례당(吳禮堂), 일본인 미야오카(宮岡恒次郎), 미국인 로웰(Lowell,P.) 등 모두 11인이었습니다.


(출처 - ‘수요기획’)


1883년 고종이 이들을 미국에 파견한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선 과거로 미국과의 관계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조선과 미국의 역사적인 첫 만남은 조선의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불태워진 사건에서 시작됩니다.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강력한 쇄국정책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조선과의 수교를 맺기 위한 미국의 물밑교섭은 수차례 이어졌고 그러던 중, 1871년 미국함대는 조선에게 문호개방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략하기에 이릅니다.


 (출처 - [부흥] 네이버 대표 역사 카페)


이 사건이 바로 신미양요이며 양국 모두 값비싼 댓가를 지불한 후, 조선은 1882522일 미국과 청나라의 주선으로 조미조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출처 - ‘수요기획’)


조미조약 체결 배경에는 청나라가 있었는데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절대적 영향권에 있었고, 대한정책의 최고책임자 였던 이홍장은 한반도에 미국을 끌어들이고자 했습니다. 바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따라서 이홍장은 조미조약에서 대한 종주권을 주장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대표 슈펠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선과 청나라 간에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청산하고, 주권 독립국가로서 조선의 새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과 중국을 제외한 서양과 정식 국교관계는 미국이 처음이었습니다.

끝까지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이라 주장하는 청나라, 그러나 미국이 조미조약을 비준, 승인한 것은 청나라는 물론 조선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고종은 미국이 청나라와 일본을 견제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미국을 믿지는 못했습니다. 조약 체결 당시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라는 친서를 청나라 요청에 의해 미국에게 제출했기 때문입니다. 초대 주한 미국 특명공사에 푸트 제독이 임명됐습니다. 특명공사 임명은 미국이 조선을 청나라, 일본과 동등한 위치에 외교적 파트너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습니다.


(출처 - ‘수요기획’)


고종은 푸트 공사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즉시 답례형식으로 미국에 보빙사 파견을 추진합니다. 미국과 조약 체결로 국제사회의 정식 일원이 된 조선, 고종은 보빙사를 통해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고 과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보빙사의 역사는 시작됩니다.

보빙사는 일본을 거쳐 태평양을 가로지르고 최종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까지 무려 22일간의 머나먼 뱃길이었습니다.


(출처 - ‘수요기획)


성대한 환영만찬이 상공회의소 주최로 열렸고 만찬에는 상공회의소 관계자는 물론 샌프란시스코 유력인사가 대거 참석했습니다.

왜 미국인들은 보빙사를 환대 했던 것일까?

신비한 동양에서 왔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20년 전 일본은 이곳을 다녀갔습니다. 그 속내는 통상이익을 통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세력 확대에 미국이 조선에 거는 또다른 기대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보빙사단은 샌프란시스코를 시작으로 대륙횡단열차에 몸을 싣고 16일만에 뉴욕에 도착했습니다.


(출처 - ‘수요기획’)


아서 대통령은 보빙사와 접견했고 보빙사는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의 여러 도시들을 보기 위해 배를 타고 보스턴으로 향합니다. 보빙사는 산업시찰이 주목적이었습니다. 미침 그곳에서는 국제박람회가 열리고 있었고 박람회에는 각종 상품이 넘쳐났습니다. 조선에는 없는 진귀한 물건들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당시 미국 최고의 백화점이었던 메이시를 비롯해 병원, 은행, 우체국 등을 시찰했습니다. 미국의 열렬한 환대에 보빙사는 최고의 국빈대접을 받았으며 태극기가 최초로 그들이 머문 미국의 보스턴 벤덤호텔에서 게양됨에 따라 그들의 자주독립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짐작케하기도 합니다.

당시 수행원 중 주축 인물이었던 홍영식은 미국의 각종 산업시설을 시찰한 뒤 고종에게 특별히 기계발전의 중요성을 건의해 그 후에 전기발전기를 도입하는 토대를 마련합니다.


보빙사가 가져온 미국의 문물은 전기, 우정사업, 근대적 교육, 실업농업을 통해 대한민국 근대발전에 초석이 됐습니다.


(출처 - ‘수요기획’)


그러나 보빙사 일행들은 숙명적인 대결의 운명에 빠지는 비극적 결말과 함께 청의 간섭을 벗어나 더 적극적인 서양문물 수용을 통해 근대화를 목표로 하던 갑신정변의 실패로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됩니다.


보빙사가 미국을 다녀온 지 131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도 독립국가로서, 경제대국으로서 우뚝 섰습니다.

부국강병한 나라로 발전하기 위한 보빙사의 개척정신과 개혁정신이 오늘날 번영의 뿌리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1883년 인천항의 개항 당시 역사적 상황을 되돌아보았는데요. 그만큼 인천항 개항도 오래되었다는 뜻이겠죠. 우리나라의 역사를 함께 해 온 인천항의 미래가 더 궁금해집니다.

[내용출처 - ‘수요기획’]